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상준 (문단 편집) == 생애 및 정치 경력 == [[1921년]]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어은리[* 인근의 봉현리, 홍곡리와 함께 [[청주 한씨]]가 많이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한돈석]]·[[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한상진(1945)|한상진]]과 같은 마을, 같은 집안 출신이다.[[http://tour.imsil.go.kr/?imsil=4O2OO&mode=read&uid=10&start=0|#]]]에서 아버지 한태연(韓泰淵, 1896. 8. 14 ~ 1984. 3. 1)과 어머니 [[성산 이씨]](1898. 9. 11 ~ 1975. 12. 28)[* 이응규(李應奎)의 딸이다.] 사이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주고등학교|전주북중학교]]를 졸업한 후 전라산업주식회사, 삼강기업사, 전북비료주식회사 등 각종 기업체의 임원을 역임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출범하고 나서인 1950년대 초반 전라북도교육위원을 역임하였다. [[1956년 지방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전라북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 자유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있었다. 1958년 신 [[국가보안법]] 파동의 와중에 전라북도의회에서도 신 국가보안법 공청회 건으로 난장판이 되자 [[대한민국 국회]]가 아닌 도의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개탄하여 도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반려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북도 임실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민정구락부라는 교섭단체에 속하였다가 1961년 4월 민정구락부를 탈퇴하고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전라북도 임실군-[[순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순창군 출신의 민주당 [[홍영기(1918)|홍영기]]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공화당에서 전라북도지부 부위원장, 당기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관선 [[전라북도지사]]를 역임한 [[이정우(정치인)|이정우]]에게 밀려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탈락하였고, 이후 [[한국해외개발공사]] [[사장]]에 임명되었다. 1986년 1월 17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가톨릭대학교 성바오로병원]]에서 [[심장마비]]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01180032920502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1-18&officeId=00032&pageNo=5&printNo=12403&publishType=00020|별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