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사군 (문단 편집) == 위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hansagoon.jpg|width=100%]]}}} || || '''왼쪽 지도가 학계의 주류설(한반도 북부설)에 따른 위치도이며,[br]오른쪽은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이른바 재야사학자들 일부의 주장이다]].'''[* 사실 삼국사기에는 요동의 공손씨 정권이 강하게 나오며 고구려도 공격하던 관구검마저 격퇴하기도 한다. 혼인 및 군사 지원 등으로 부여,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다 결국 위, 고구려의 공세로 흡수된 것으로 나오는데, 오른쪽 지도라면 설명하기 곤란한 면이 있다. ] || 오른쪽 지도는 난하 요수설을 기반으로 한 지도로, 일명 [[유사역사학|재야사학]]에서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주장하는 것이다]]. 비정(比定)이라는 말은 '비교하여 위치를 정한다'는 뜻으로, '비정 연구'가 어떤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위치 추정 연구와 같은 말이다. 즉, 굳이 오른쪽에 비정 연구에 의한 한사군도라 따로 쓸 건 아니고 왼쪽 학계 정설 지도도 비정 연구인 것이다. 고고학적 성과를 보면 [[평양]] 낙랑 토성에서 낙랑 예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와당 발견, [[한무제]] 때 쓰던 오수전 동전 + 3천여 기에 이르는 목곽묘, 귀틀묘, 진실묘가 발굴, [[황해북도]] [[봉산군]]에서 대방태수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오른쪽 지도에 있는 요동군과 낙랑군 등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원안에 있는 영토, 오늘날 [[중국]]의 [[허베이성]]과 [[산둥성]]은 [[전국시대]] [[연나라]]와 [[제나라]]의 땅으로, [[진나라]]와 [[한나라]] 때도 매우 중요한 지방이었다. 주로 위치에 대한 논란이 많이 다뤄지는데, 금방 폐지되거나 이전되어 버린 나머지 세 군현보다 낙랑의 위치가 [[떡밥]]이었다. 물론 인터넷 등지에서 [[음모론]]의 형태를 띠고 있는 논란일 뿐, 학계에서는 위치에 대해서는 이미 [[일제강점기]]에 결론을 내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문헌 사료만 가지고 일부 학자들이 한사군의 위치를 놓고 다른 곳으로 비정하는 일이 있었으나, 대다수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 등)이나 《[[고려사]]》 등 국가의 공인 사서 및 지리서, 그외 저명하고 가치 있는 사서들은 모두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학계에서 낙랑군이 평양에 없었다고 보는 학자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사실상 논쟁이 끝난 상황이다. 위치에 대한 논란의 실질적인 시발점은 [[신채호]], [[정인보]] 등의 민족 사학자들로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발굴이 조작된 것이라 주장하며 [[민족주의]]적인 방어 논리로서 제기되었다. 신채호는 평양 지방의 지명이 '낙랑'이며, 진번, 임둔, 현도 역시 마찬가지로 각각 가리키는 지명이 있을 것이라 했고, 한사군은 [[무제(전한)|한무제]]가 [[삼조선]] 전체를 공격해 합병한 뒤 각각의 지명의 위치에 세우려고 하다가 실패한, 즉 '가설'된 군이라고 보았다. 일단 당시 일제가 조선사 편찬 위원회를만들고 후에 조선사편수회로 재조직시켜서 일본 민족의 우위성을 입증하고 한국인의 민족 의식 말살을 목적으로 한국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한국사를 왜곡했었다. 하지만 한사군에 관한 신채호 등의 견해는 대부분이 원전의 [[한문]]을 오독했거나 추측이나 [[정신승리|희망사항]]에 따른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재 [[한국]]의 사학계는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물론 당시 많은 민족 사학자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면서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없는 환경'''이었던 점은 이해해야겠고, 일제에 대한 저항 측면에서 일부러 더 민족주의적 사고를 강조했던 점도 있겠으나, 학문적으로 역사는 진실을 찾는거지 목적에 끼워맞추는 분야가 아니므로 이들의 독립운동에서의 업적과 별개로 이러한 주장은 역사학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낙랑군의 위치에 관한 논란으로, [[평양]] 근처의 낙랑군은 사실 [[최씨낙랑국]]이 아니냐는 논란이 존재한다. 자세한 것은 하단 및 해당 문서 참조. 한편, [[북한]]에서는 리지린을 필두로 하여 '난하요수설'을 토대로 한 낙랑군 요서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주장을 위해 증거를 끼워 현재 한국내에서는 주류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난하요수설을 바탕으로 한 낙랑군 요서설 또는 요동설을 지금도 일부에선 열심히 신봉하고 있는데, 바로 [[유사역사학]]자들. 이들은 인터넷과 언론, 출판 시장 같은 곳에서 끊임없이 이런 설들을 재생산하고 있다. 심지어 국회에서 토론회를 강제로 개최하기도 했다. [* 이 국회 토론회를 주도한 임승국은 그나마 쪽팔린건 알았는지 "내가 북괴 사학은 소개 안하려고 했는데 니들땜에 어쩔 수 없이 한다"고 변명을 시도하긴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본위키한사군지도.png|width=100%]]}}} || ||<:> '''한때 일본 위키에 기재됐던 한사군 지도''' [[https://ja.wikipedia.org/wiki/%E6%BC%A2%E5%9B%9B%E9%83%A1|#]] || 중국과 일본에서는 한사군의 영역을 신라 및 진한과 변한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남부까지 확대해서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한국사의 종속성을 최대한 강조하려는 모양. 허나 해당 주장은 중국과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한사군 초기라면 모를까 나중에는 이 지역이 전부 한사군의 지배 밖으로 벗어났다고 (즉, 현지인인 마한인들이 독립을 쟁취했다고) 인식하고 있다. 단, 중국의 패권주의 면모가 심해지는 현재 중국에서 그린 한대의 역사 지도에서 한사군의 영역이 서북한을 넘어 남한의 경기도와 충청도까지 확장된 점은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마한 전체를 한사군 영역으로 그린 것은 삼국사기의 남대방 관련 기록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즉, 북대방, 남대방설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진번군이 한때 한강 이남까지 지배했던 것은 여러 기록을 보아 사실로 보이나 기원전 1세기에는 결국 마한이 이들을 격퇴하고 지금의 경기도(한강 이남)까지 마한의 영역으로 편입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기원전 2세기 무렵의 위만조선의 세력권이 서남쪽으로 지금의 한강 이북까지 지배했다고 나온다. 한강 이남은 진국의 영역으로 본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