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발리파 (문단 편집) == 이븐 타이미야 그리고 한발파의 중흥 == 그 후 비주류로 전락했다가 이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된 시기는 [[십자군 전쟁]] 이후였다. [[몽골 제국]]의 침략과 [[십자군 전쟁]] 양면전선에 시달리던 이슬람 세계는 타종교에 대해서 더 배타적으로 변해갔다. 몽골 침략자들이 세운 [[일 칸국]]에서는 무슬림들을 배제하고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을 우대했으며, 십자군 전쟁으로 성지를 잠시나마 빼았겼던 이슬람 세계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상황이었다.[*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이슬람 세계가 기독교권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던 상황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성지를 빼았겼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이븐 타이미야]]'''라는 법학자는 아흐마드 빈 한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시아파]][* 쉬아파는 무으따질라 철학을 적극 수용했다.] 및 [[수피즘]]에 대한 맹공격을 퍼부었다.[* 다만 이븐 타이미야 역시시대 정황상 몇몇 수피 교단과 친분은 있었다.] 이븐 타이미야의 주장은 [[튀르크족]] 통치자들의 노여움을 샀는데, 이는 이븐 타이미야가 수피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을 성지순례하면서 승천 같은 기적을 바라는 일이 미신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은 당시에도 기독교인들 뿐만이 아니라 무슬림 순례자들이 많았으며, 이들 덕분에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투르크인 통치자들도 짭짤한 소득을 올렸었다.] 결국 한발리 파는 [[오스만 제국]]시대까지도 계속 탄압당하다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아라비아를 침략하고 식민화하기 시작하면서 [[와하브파|와하비즘]][* 와하브파의 기원이 되는 압둘 와흐하브는 이븐 타이미야의 저서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이 사상적인 토대를 대강 갖추게 되고, 이것이 현대 [[이슬람 근본주의]]와 [[이슬람 극단주의]]로까지 흐르게 된다. 하지만 이븐 타이미야에 대해서 이슬람 극단주의의 토대가 된 만악의 근원이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되는게, 일단 수백년 전 사람을 갖다가 현대 이슬람 근본주의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마키아벨리]]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원형이라는 식의 지나친 비약이 된다. 오히려 이 사람 자체는 오늘날 현대인 기준으로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당시 이슬람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예배 드리고 꾸란을 베고 잠자면 우주 한가운데로 여행할 수 있다~'''같은 주장을 하며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챙기는 [[돌팔이]] 수준의 율법학자들이 '''매우''' 많았다. 이븐 타이미야는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예루살렘에서 예배하고 꾸란 베고 자면 천국 간다고 누가 그러던?'''"이라며 이런 돌팔이들한테 반박을 가하는 등 오늘날의 근본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상식적인 행동으로 유명해졌다. 이븐 타이미야가 없었다고 해도 이슬람 극단주의가 안생겼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수피 중에서도 여성인권에 대해 적대적이라던지 타 종교에 대해서 대단히 배타적인 종파들이 많다. 유명한 전투민족인 [[튀르크족]]이 왜 수피즘을 좋아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정작 이븐 타이미야의 학설 중 온건한 학설 상당수는 묻히다시피 했다.[* 이븐 타이미야는 비무슬림이 영원히 지옥불에서 고통받게 된다는 이슬람 주류 학설을 믿지 않았으며, 비무슬림이건 무슬림이건 죄의 계산이 끝나면 천국에 올라간다는 견해를 가져서 비판을 받았다. 또한 꾸란의 2장 256절에 나오는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는 문장을 폐기된 계시로 보는 견해를 지지하지 않고, 앞으로도 기독교도와 유대인에게 일정 수준의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논문을 남긴 바 있다.] 당시 상술한 돌팔이 무슬림 성직자들하고 이븐 타이미야 및 그 후계자들이 열심히 치고 받은 선례가 없었더라면 이슬람권은 중세 유럽의 돌팔이 성직자들의 전횡 비슷한 일이 횡행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 횡행하고 있었다. 중세 당시에도 사이비 성직자들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가리지 않고 문맹 농민들을 상대로 혹세무민을 행했다. 중앙아시아에는 이를 비꼬는 다음과 같은 속담이 전해진다.[* 당시 중앙아시아 [[카슈미르]]에는 파슈툰족 수피들이 참배하던 예수의 무덤이라 알려진 장소가 있던 것은 물론 사마르칸트 일대에는 현지 [[부하라 유대인]]들이 참배하던 [[다니엘]]의 묘지가 있으며,(참고로 다니엘의 묘지는 이란의 수사에도 있고, 이라크에도 꽤 많다...[[https://www.atlasobscura.com/places/tomb-daniel-samarkand|#]])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과정을 거쳐 마태의 유골이 오늘날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 호]] 근방에 있는 [[네스토리우스파]] 수도원 내에 보관되어 참배객들의 주머니를 털기도 했다.] > 영험하다고 알려진 한 성묘가 있었다. 이곳은 쿠란에 나오는 위대한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의 무덤으로 알려졌는데, 이곳에서 성묘를 향해 절을 하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성묘를 관리하던 성직자는 자신의 제자에게 당나귀 한 마리를 주고 다른 곳으로 내보냈다. 당나귀를 타고 가던 성묘 관리인의 제자는 여정 도중 당나귀가 병들어 죽자 그동안 정들었던 당나귀가 죽은 게 가슴아파 당나귀를 땅에 묻은 후에 넋 놓고 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에게 왜 우냐고 물어보니 그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이곳에 죽어 묻히게 되어 슬퍼서 운다고 답했다. 이후 당나귀가 없어서 더 이상 여정을 할 수 없었던 성묘 관리인의 제자는 당나귀의 무덤을 장식하고 그 근처에 집을 지어 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나귀의 묘에서 소원을 빌면 영험한 효과를 얻는다는 소문이 퍼졌고, 당나귀 무덤 근처에 오두막을 지은 성묘 관리인의 제자는 이곳이 쿠란에 나오는 이스라엘 예언자의 무덤이라고 주장한 뒤 더 많은 성묘객을 얻고 이들이 주고 간 돈으로 새로 석조저택을 지었다. 나중에 제자는 자신이 스승과 함께 머무르던 성묘로 찾아간다. "그나저나 여기 뭍혀계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진짜 예언자 XXX가 맞습니까?" "아, 여기 묻혀 계시는 분은 당신 성묘에 묻힌 친구의 아버님이라네." 전근대 지식인들의 주요 사회적 의무 중 하나는 바로 이런 돌팔이 성직자들에게 고증학적 근거를 가지고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븐 타이미야는 당시 지식인의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물론 이븐 타이미야가 긍정적인 영향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이븐 타이미야가 남긴 부정적 영향의 대표로는 언어 교육이 있다. 그는 '''아랍어 이외에 언어를 일부러 배우는 것은 불신앙을 숨기는 위선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모국어 이외에 다른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면 사고방식이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를 전적으로 '''불신''', '''위선'''으로 싸잡어 몰아버림은 극단이나 아집이다. 이븐 타이미야가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불신앙과 위선'이라고 주장한 내용을 [[오스만 투르크]]의 성직자들이 그대로 배껴서 밥그릇 싸움할 때 잘 써먹었고,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의 [[통역]]들은 주로 기독교도 출신자[* [[파나리오테스]] 항목 참조]와 [[유대인]]들이 담당하였다. 역설적으로 이븐 타이미야의 억지 주장 때문에 제국에서 통역 일을 맡은 유대인들은 아랍인 무슬림보다 훨씬 대우를 받았고, 덕분에 이들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같은 대재앙도 가까스로 피해갈 수 있었다. 아흐마드 빈 한발의 사상을 계승한 이븐 타이미야의 저서는 [[샤피이파]] 학자 몇몇이 그의 사상을 계승하고, 결정적으로 [[이븐 카시르]]의 유명한 쿠란 주해서가 이븐 타이미야의 해석을 상당 부분 반영하면서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소실되지 않고 계속 보존되었다. 이렇게 전해진 한발리파 이븐 타이미야의 해석은 [[와하브파]]의 시조가 되는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하브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