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발리파 (문단 편집) == 초창기 역사 == 한발리파는 초창기에는 체계적인 학파가 아니었다. 이븐 한발은 그냥 '[[꾸란]]은 신의 말씀 그 자체이므로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고 '''꾸란 해석의 바탕은 반드시 하디스뿐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아버렸을 뿐 추가적으로 이런저런 말을 덧붙인 것이 없다. 이후 이븐 한발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무함마드 알 부카리가 [[하디스]] 모음집을 편찬하고 하디스의 신뢰성에 등급을 매기면서 한발 학파는 점차 체계성을 갖춘 학파로 발전해나갔다. 오늘날 와하브파들은 무함마드 알 부카리가 한발리파에 속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부카리는 [[샤피이파]] 소속이었고, 대신 자신의 하디스 수집본의 검수를 받기 위해 직접 바그다드로 가서 이븐 한발을 만난 적이 있다.] 성격이 온화했던 부카리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직하고 완고했던 이븐 한발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었고, 종교관도 차이점이 없지 않았다. 알 부카리와 이븐 한발이 사망하기 이전 직접 교류한 제자들은 대개 [[샤피이파]] 법학파 소속이었다. 무함마드 알 부카리의 이슬람관이 모호하다고 비판하면서 새로 <사힛 무슬림>이라는 하디스 편집본을 새로 편찬한 "[[https://en.wikipedia.org/wiki/Muslim_ibn_al-Hajjaj|아불 후세인 나이사부리(بو الحسين النيسابوري)]]"야말로 오늘날의 한발리파의 직계 기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나이사부리 역시 샤피이파였다. 하디스 편집본들이 확립되면서 이슬람 세계에서는 무타질라파 같은 사변철학의 입지가 축소되었고, 부작용으로 하디스를 광신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미 중세 말에 그리스-로마 의학을 계승하여 발전하던 당대의 이슬람 의학이 불온하다며, 무슬림들은 하디스에 기록된 예언자 [[무함마드]]가 알려준 민간 요법 외에 의학으로 치료받으면 안된다고 멍멍거리는 놈들도 생겨났다. 오늘날 보코하람의 시조인 셈이다. > 예언자 무함마드는 우리에게 종교를 설파하기 위해 온 것이지 민간 요법 같은 잡동사니를 가르치러 온 것은 아니다. 예언자의 언행에서 나오는 의학과 관련된 언급을 결코 '''강제적 성격'''을 지닌 율법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 > [[이븐 할둔]] 도저히 참다못한 다른 무슬림들은 상술한 이븐 할둔의 사례처럼 "예언자는 종교를 알려주려 온거지, 민간요법 의술을 알려주러 온게 아니니까 제발 그만하라."며 항의하곤 했다. 이븐 할둔 역시 음악을 금기시하던 보수적인 학자였는데도 이런 말을 책에 적었을 정도니, 이들의 비상식적인 횡포를 알 만 했다. 중세 당시의 한발리파는 주류 교파가 되지는 못했지만 대신 이븐 한발이 칼리프 알 마문, 알 무타심과 대치한 일은 바그다드의 순니파 시민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945년 [[부와이흐 왕조]] 군벌들이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압바스 칼리파들을 꼭두각시로 삼았다. 이를 계기로 991년부터 순니파 주민들은 시아파랑 계속 충돌하였다. 1051년에는 시아파들이 이븐 한발의 묘지를 불태우려다 저지당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순니파들이 시아파 모스크들과 성묘들을 계속 불을 질렀기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