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만두 (문단 편집) == 선수 관련 == 당시 박찬호는 1997년 14승, 1998년 15승으로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신인이었기 때문에 1999년은 20승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 해 박찬호는 5점대 방어율로 생애 처음으로 부진한 풀타임 출장 경험을 갖게 되는데, 그 시발점이 이 사건이었다.[* 이전해 많이 던지고 병역 특례 때문에 12월에 방콕 아시안게임을 뛰면서 쉬지 못한 탓도 크다. 99년 시범경기에선 몸이 일찍 올라와 있었는지 좋은 성적을 냈지만 시즌 들어선... 근데 국내 어느 강연에선 이때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 한창 빠진 것도 부진의 한 원인이었다고 한다. 2는 시즌 다 끝날 1999년 9월 30일에 나왔으니 시기상으론 확장팩인 로마의 부흥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1,2 모두 재미있게 했었다고 한다.] 1999 시즌 박찬호의 최종 성적은 13승 11패, ERA 5.23. 13승을 거둔 것을 보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시즌을 보내지 않았나 싶을 수도 있지만 ERA나 WAR(bWAR 0.2)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승수 쌓기는 타선빨과 운빨이 좀 작용했다(...). 실제로 박찬호는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1996 시즌부터 FA 이적 전 시즌인 2001 시즌까지 딱 한 해만 빼고 다저스 팀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bWAR을 기록했는데, 그 딱 한 해가 바로 1999 시즌이었다. 팀 내에서 2선발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이스마엘 발데스]](9승 14패, ERA 3.98, bWAR 2.3)와-- [[유리몸]]-- [[대런 드라이포트]](13승 13패, ERA 4.79, bWAR 1.2)가 내용 면에서는 박찬호를 앞섰으니, 한만두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타자 주인공 [[페르난도 타티스]]는 그 때만 하더라도 미래가 기대되는 거포 유망주였고 그해 타율 .298에 34홈런 107타점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뒀으나 다음 해부터 잦은 부상으로 실력 발휘를 못 하다가 결국 은퇴했다.[* 그렇다고 해서 타티스가 한 시즌만 풀로 뛰고 나머지 시즌은 잠깐 메이저를 밟다 만 수준의 선수는 아니었다. 물론 주전으로 뛴 해는 98, 99, 00, 02, 09년에 불과했고 20홈런을 넘긴 시즌은 1999년이 유일했다지만 그 후로도 트리플A와 메이저를 오가며 2010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 심지어 2004년부터 2007년까지는 2006년에 20경기 남짓 뛴 것이 출장 경기의 전부일 정도로 망했지만(2006년과 2007년은 붙박이 마이너였고 2004년과 2005년에는 부상 때문이었는지 아예 마이너리그조차 못 나왔다.) 2008년과 2009년은 메이저리그에 복귀하여 각각 300타석 이상 나오는 등 나름대로 재기에 성공했었다. 2010년에 백업, 대타 요원으로 주로 나와 1할대 타율을 남기고 메이저리그를 떠났다. 그 후로 4년간 윈터 리그에서만 뛰다가 2014년에 멕시칸리그에 용병으로 진출했던 것이 마지막 기록. 그러나 멕시칸리그에서도 타율 .241이라는 썩 좋지 못한 성적을 기록한 뒤 방출되었고, 이후 은퇴했다.] 이렇게 타티스는 기록만 놓고 보면 잠깐 반짝했다가 잊혔을 선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불멸의 타자'''로 남게 되었다. 99년 남긴 이 한 경기로 인해 2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고 있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메이저리그에서도 불멸의 기록으로 언급되고 있을 정도. 심지어 '''타티스가 그 날 썼던 헬멧은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는 정말 딱 한 경기, 그 중에서도 딱 한 번의 이닝으로 [[전설]]이 된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