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나라당 (문단 편집) == 계파 갈등 == [include(틀:후기 한나라당의 계파 분류)] 한나라당의 계파 갈등은 크게 2번에 걸쳐 일어났다. * 1차: [[민주계]] vs [[민정계]]의 계파 갈등(1997년 ~ 2003년) * 2차: [[친이]] vs [[친박]]의 계파 갈등(2004년 ~ 2012년) 선행 조직이었던 민주자유당이나 신한국당 역시 계파간 갈등이 심하긴 했지만 이회창계와 반이회창계가 다투던 전반기를 지나서 한나라당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계파 간 갈등이 절정에 이르러서 공천학살과 경선/공천 불복 후 탈당이 밥먹듯 일어났다. 민주자유당의 계파갈등이 민정, 민주, 공화의 3자 대결이었다면 한나라당의 계파갈등은 그 유명한 [[친이]] vs [[친박]]의 양자구도였기 때문. 사실 계파간 갈등이 이렇게까지 심했던 이유는 한나라당이 가진 폭넓은 정치적 스팩트럼이 주 원인이다. 당시 한나라당 vs 민주당계 정당의 구도는 영호남간의 지역구도가 강해서 한나라당에는 극우적 인물, 중도 우파 성향의 인물 뿐 아니라 개혁적인 인사들까지 여럿 포진해 있었고 다양한 정치 스팩트럼을 가진 이들이 모이다보니 자연히 계파갈등이 심해진 것. 2000년대 초반까지는 민주계와 민정계가 한나라당의 주요 계파로서 세력싸움을 벌였다. 우위를 쥐고 있었던 것은 민주계로, 당시 [[이회창]]의 강력한 정치적 파워로 개혁보수 세력을 수혈했으며 일부 민정계 세력은 이회창을 지지하기도 하는 등 위상이 막강했다. 2000년 총선 당시 이회창은 민정계의 주축이었던 [[김윤환]]과 [[허화평]] 등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는데, 이에 반발한 김윤환이 탈당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하는 등 민주-민정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도 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민정계가 잠시 갈등을 봉합하고 이회창을 전적으로 밀었지만[* 여기에는 [[후보 단일화 협의회|후단협]]에 가담한 민주당 출신 민정계 의원들이 합세하기도 하였다.] 이회창은 제16대 대선에서 낙선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회창이 은퇴한 뒤 민정계의 주축이었던 [[최병렬]]이 당권을 잡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김원웅]] 전 의원과 개혁파 5인방(소위 독수리 5형제) 등이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하기도 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에 적극 가담한 한나라당은 정치적인 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최병렬이 당대표직을 물러나고, 박근혜가 당대표에 선출되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지휘하게 되었다. 당초 개헌저지선까지 넘겨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선거에서 121석이라는 호재를 얻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박근혜는 한나라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떠오르고 당권을 완전 장악하게 되었다. 박근혜의 급부상과 함께 한나라당 내 세대교체가 일어나, 기존 민정계를 필두로 한 강경 보수 인사들은 [[박근혜]]를 중심으로 뭉쳐 [[친박]]을 이루었고 남은 [[상도동계]], [[이회창계]], 민주계 등 온건 보수 인사들은 [[이명박]]을 중심으로 뭉쳐 [[친이]]계를 이루었다. 이 시기부터 한나라당 내 세력 싸움은 친이 VS 친박 구도로 재편되어 격렬한 계파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이는 [[제17대 대통령 선거|17대 대선]], 그리고 [[제18대 국회의원 선거|18대 총선]]을 거치며 폭발. 대선에서 승리하며 당권을 장악한 [[친이]]계가 [[친박]]계의 [[서청원]], [[김무성]] 등을 대거 공천 탈락시키고 이에 반발한 친박계가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 친박 무소속 연대를 만들어서 이른바 [[이재오]], [[이방호]] 낙선운동을 벌이며 경남 사천에서 이방호 후보가 [[강기갑]]에게 밀려 낙선하고 이재오 역시 은평구에서 낙선했다가 보궐선거로 다시 돌아오는 등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홍준표]][* '''"독고다이 정치인"'''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도와주고 친이계의 지원을 업어 당대표로 취임하는 등 엄연히 친이계의 일부로 보는 것이 맞다.][* 이명박 전 대통령 탄생에 기여한 정두언을 친이계로 안 보듯 이 때 홍준표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이도 썩 좋지 않았다. BBK 저격수임에도 불구하고 법무부 대신 환경부장관을 제의했기 때문이다. 홍준표는 이 당시 친박에 가까운 무계파로 분류되었으며, 당대표도 친이계가 아닌 사실상 친박계의 묵인으로 될 수 있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148286|#]]] 대표 체제가 무너지고 이명박 정부 말기로 들어서면서 마땅한 대권주자[* [[김문수]], [[안상수(인천)|안상수]] 등이 경선에 출마하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박근혜의 대항마가 될 수 없었다. 인지도나 정치 기반부터가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를 세우지 못한 친이계는 자연스레 당권을 빼앗겼고 박근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하여 친이계를 사실상 궤멸시키면서 계파간 갈등 역시 [[친이]] vs [[친박]]에서 [[친박]] vs [[비박]]으로 변화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