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나라당 (문단 편집) === [[이명박 정부]] - 다시 여당이 되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제17대 대통령 선거#s-2.1|[[파일:2007년전당대회.jpg|width=100%]]]]}}} || ||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17대 대선]] 경선 당시 찍힌 사진으로, 사진 속 인물들은 왼쪽부터 [[이명박]], [[원희룡]], [[박근혜]], [[홍준표]]이다. || [[참여정부]]의 실정에 따라 대안 정당을 찾은 무당층의 지지율 이동으로, 2006년 이후 한나라당은 지지율에서 고공행진을 달린다.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과의 격차가 대부분 2~30%p, 때로는 3~50%p를 이루며 여론조사 무당층의 대부분을 흡수하는데 성공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의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리얼미터 기준 40% 이하로 떨어진 적이 [[http://www.realmeter.net/d-12-%ec%9d%b4%eb%aa%85%eb%b0%95-41-7-%ec%a0%95%eb%8f%99%ec%98%81-16-9-%ec%9d%b4%ed%9a%8c%ec%b0%bd-15-8-3/|'''단 1번''']]이었고, 지지층 결집이 극에 달한 2007년에는 [[http://www.realmeter.net/%ea%b2%bd%ec%84%a0%ed%9b%84-%ec%b2%ab-%ec%a7%80%ec%a7%80%ec%9c%a8-%ec%a1%b0%ec%82%ac-%ec%9d%b4%eb%aa%85%eb%b0%95-60-%ec%9c%a1%eb%b0%95-3/|'''61.6%''']]라는 신화적인 수치를 찍으며 [[정권교체]]를 향해 나아갔다. 차곡차곡 힘을 길러 재보궐선거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이원복(정치인)|이원복]], [[윤두환]], [[정진석]], [[이주영(정치인)|이주영]] 등이 정계에 복귀하고 [[신상진]], [[임해규]], [[차명진]], [[고희선]], [[정진섭(정치인)|정진섭]], [[고조흥]], [[이진구(1940)|이진구]], [[정희수]], [[김정권]] 등의 정치 신인들이 정치에 진출하며 지지율이 상승하였고,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대승을 거쳐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경제살리기 공약[* 이를 드러내듯 이명박 후보의 슬로건이 "실천하는 경제대통령"과 "국민 여러분, 성공하세요" 혹은 "국민 성공시대"였다.]으로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17대 대선]]에서 승리하게 되어 10년만에 여당이 된다. 이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18대 총선]]에서도 과반수의 의석인 153석[* 원래는 '''180석''' 이상을 바라보았으나, [[친박]]과 선진당의 선전으로 153석 '''밖에''' 거두지 못한다. 망해도 153석이었으니, 당시 한나라당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알 수 있다.]을 확보하게 된다.[* 이후 [[홍사덕]] 등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 지역구 당선인들이 복당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180석 남짓의 초거대 여당이 된다. 거기에 합당만 안 했을 뿐이지 친한나라당 성향을 보이는 8명의 [[친박연대]] 비례대표를 더하고 가끔씩 한나라당에 동조하던 [[자유선진당]] 18석을 더하면 개헌선을 넘는 초거대 보수진영이었다. 이는 18대 국회 말기에 통과된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의석이기도 했다.] 이때 한나라당의 [[친이]]는 [[박근혜]]의 힘을 빼고자 친박 공천학살을 단행하여 친박계 의원들이 대거 탈당해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와 친박 무소속 연대를 결성해 친이계에 맞섰다. 이 때문에 당시에 현역 의원들 중에서 공천 탈락, 불출마[* [[강재섭]] 전 대표는 본인의 [[지역구]]인 [[대구광역시]] [[서구(대구 선거구)|서구]] 공천을 받아 출마할 예정이었으나, 공천 파동의 책임을 지고 불출마했고, 대신 이종현 [[경북대학교]] [[교수]]가 공천을 받았다.], [[낙선]]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남아있던 민정계들이 거의 공천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무소속, 친박연대 당선 후 복당한 사람까지 합하면 현역 의원들 중에서도 당선된 예도 있고 이 때 당시 민정계는 거의 정치에서 물러났지만 그래도 아직 약간이나마 건재했다. 그리고 정치신인들도 많이 정치에 진출했다. 당시 남아있던 민정계 출신은 [[김일윤]], [[이상득]], [[김형오]] 등이었다. 또 [[정몽준]]은 친이계 중 이상득계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검역 문제로 인한 [[2008년 촛불시위]], 당내에서 2007년 경선부터 갈라진 [[자유선진당]]과 친박(박근혜)계열, 그리고 친이(이명박)세력의 내부 다툼[* 주로 이재오계와 이상득계의 다툼이었다. 원외인사였던 이재오보다는 대통령의 친형인데다가 현직 국회의원 신분이던 이상득이 더 강했다는 것이 중론.] 등으로 인해 [[2009년]] [[2009년 재보궐선거 #s-2|4.29 재보선]]에서 5곳의 선거구 중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단 한곳에서도 당선되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당시에 [[구본철]], [[윤두환]], [[김일윤]]이 의원직을 잃었는데 한나라당이 차지하였던 2곳은 민주당에 빼앗기고, 그래도 친박 계열 무소속이 당선된 경주는 보수텃밭을 사수했다. 당시 그나마 살아온 보수성향 정치인도 친박 성향이었던 [[정수성(1946)|정수성]]이었다. 같은 해 [[2009년 재보궐선거 #s-3|10.28 재보선]] 역시 5곳의 선거구에서 치러졌는데, [[박희태]] 대표가 스스로의 정치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당 대표직을 사퇴하고 양산시에 셀프공천을 시전하면서 뒷말이 많았다. 그래서 [[정몽준]] 최고위원이 대표직을 승계하게 된다. 수도권 2곳을 [[민주당(2008년)|민주당]]에 내주고, [[텃밭(정치)|텃밭]]인 [[경상남도|경남]] [[양산시]](당시 단일 선거구.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양산시 갑|갑]]과 [[양산시 을|을]]로 분구)에서도 고전 끝에 신승[* 양산시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양수(1960)|김양수]] 전 의원이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13% 이상의 득표율을 거두면서 타격을 입었다. 그나마 야권 분열 덕택에 [[박희태]] 후보가 겨우 이겼다.]을 거두는 등, 야당에 3:2로 패배하여 심상찮은 민심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 역시 텃밭인 [[전주시]] [[덕진구]]에서 [[무소속]] 출마한 [[정동영]] 전 후보와 무소속 연합을 이룬 [[신건]] 후보(전주 [[완산구]] 갑)에게 참패해 이미지를 크게 구겼다.] [[정신승리|당사자들은 재보궐선거에서 이만하면 잘했다고 자축했으나]], 한나라당이 확실히 승리한 곳은 민주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은 [[강원도]] [[강릉시]]가 유일했다. 그래도 [[권성동]]이 정치에 진출했고, [[박희태]] 전 대표가 복귀하며 이재오의 공백으로 흔들리던 친이계가 규합되었다. 당시 한나라당 계열 정당에서는 [[허범도]]가 의원직을 잃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수도권을 주축으로 혼전이 예상되었다. 야당 측에서는 야권 단일화를 추진했고, 한나라당 입장에서도 세종시 문제 등 몇가지 이슈로 인해 한나라당이 야당이었던 2006년보다는 고전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나 선거 직전 터진 천안함 사태로 북풍을 몰아 어느 정도 우세할 것으로 내다보았지만 선거는 '''한나라당의 참패'''였다. 여당은 선거 전까지는 상당한 우세를 자신하였으나, 막상 선거가 끝나고 보니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서울특별시장]]마저 [[한명숙]] 후보가 상당히 따라왔으며[* 개표 결과 0.60% 26,000여표 차이었다. 거의 모든 자치구에서 이겼으나 끝내 [[강남3구]]의 몰표를 이기지 못하고 져버렸다. [[강남구|강남]] [[서초구|3]][[송파구|개]] 선거구에서만 126,930표 차이가 나왔다. 참고로 다른 22개 선거구에서는 10,000표 이상의 차이가 난곳은 불과 3곳이며 35,245표 차의 [[관악구]]를 제외하면 11,000표 정도차이 였다.][* 또 서울시장 본선과는 별개로 선거 이후 또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구청장과 시의회 의석은 [[민주당(2008년)|민주당]]이 싹 쓸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오세훈이 뭔 정책을 추진하려 해도 민주당 출신 구청장들이 반발해댔고 시의회는 오세훈이 추진하려는 정책에 맞는 입법이 심의조차 잘 안 돼서 뭘 제대로 할 수 있던 것이 없었다. 반대로 민주당이 추진하려는 조례에 대해 오세훈이 거부권을 행사해도 민주당에게 그걸 상쇄시킬 정도의 의석이 있었기에 민주당이 원하는 입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괜히 오세훈이 2선 임기 당시 식물시장이라 불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키였던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추진해 캐삭빵을 했던 게 아니었다.] 부동의 텃밭이라고 생각했던 [[경상남도]][* [[김혁규]] - [[김태호]]로 이어지는 두 명의 도지사가 4선을 한 곳이었다.]와 [[충청남도]], [[강원도]][* [[북한]]과 가깝고, 영동 지방 특유의 보수적 정서 때문에 친한나라당 성향이 강한 곳이다.]에서도 [[김두관]], [[안희정]], [[이광재]] 후보에게 패해버렸을 정도다. 2030 유권자들은 한나라당 지지자의 2배 이상이 민주당을 지지했다. 특히 만년 텃밭 경남에서의 패배는 당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김문수]]가 겨우 수성한 경기도지사도 [[심상정]]이 사퇴하지 않았더라면 [[유시민]]에게 패배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패배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당 내 내분이 다시 불이 붙었다. [[정몽준]] 대표는 참패의 책임을 지면서 사퇴하고 [[김무성]] 원내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에 올랐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다시 계파갈등의 늪에 빠지게 되는데 [[경남지사]]를 비롯해 경선에서 승리했으나, 본선에서 져버린 친이 계열은 패배의 책임을 추궁받았다. 친박도 역시 박근혜 전 대표가 친박 계열 후보들만 지원 유세를 해줬는데도 친박은 단체장 자리는 하나도 얻지 못했다. 이후 친박은 선거 직후인 6월 29일 자유선진당, 민주당과 함께 세종시의 행정도시화를 중단하는 수정안을 부결시켰으며, 이로서 친박이 여당내 야당 노릇을 한다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결국 친이/친박 모두 대선 후보 지지율 동반 하락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세종특별자치시]] 수정안 부결에도 불구하고, 당시만 해도 현직 대통령의 힘이 아직 강한 집권 3년차였다. 2010년 7월 14일의 제11차 전당대회에서도 [[안상수(창원)|안상수]], [[나경원]], [[정두언]] 등 대표적인 친이계 의원들이 대거 대표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홍준표]] 최고위원은 범친이였지 순수한 친이라고 보기엔 거리감이 있었다.] [[친박]]은 [[서병수]] 딱 한 명으로, 그나마도 꼴찌였다. 무당파나 개혁계 후보들도 당선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2010년 재보궐선거#s-2|7.28 재보선]]에서 승리하며 친이계의 좌장격인 [[이재오]]가 돌아왔고, [[이상권]], [[한기호]], [[윤진식]], [[김호연(기업인)|김호연]] 등의 정치 신인들도 탄생했다. 이후 잠깐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오르게 된다. 하지만 친이계는 나름대로 이명박 전 대통령과 각을 세우며 차기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이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불만(소위 "진노")만을 샀다. 이른바 [[보온병]], 자연산 실언 논란과 함께 안상수 전 대표의 이미지는 무참하게 무너졌다.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김태호(1962)|김태호]] 의원[* 1998년 37살의 최연소 경남도의원, 2002년 41살의 최연소 거창군수를 거쳐서, [[2004년 재보궐선거 #s-2|2004년 6.5 재보선]] 당시 43살으로 최연소로 [[경남도지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경남지사 3선을 포기하고 국무총리 입각을 노렸으나 청문회에서 낙마했던 상황.]을 제외한 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패했으며, 심지어 민주당 측 이광재 [[강원도지사]]의 비리 문제로 터진 강원도지사 재보궐선거에서조차 또 패했다. 한나라당의 텃밭이었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을에서 거물인 [[강재섭]] 전 대표가 [[손학규]] 전 [[민주당(2008년)|민주당]] 대표에게 나가떨어진 것[* 이 곳은 공천 파동의 영향이 컸다. [[정운찬]] 전 총리와 강재섭 전 대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놓쳐버린 경우.][* 강재섭 전 대표의 '15년 분당토박이' 포지션 자처와 박근혜의 지원거부 등이 패배의 요인이었다.]역시 치명타였다. 그나마 의의를 두자면 야권에서 떠오르던 친노계 [[유시민]]이 타격을 입은 것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이후 통합진보당 창당과 함께 유시민의 정치적 생명은 저물어갔다.] 결국 안상수 전 대표는 사퇴했으며, 한나라당은 지리멸렬해지기 시작했다. [[정의화]] 국회부의장이 비상대책위원장을 하다가 당대표에 [[홍준표]] 의원을 선출하며 당을 일신하려는 노력을 해 보았고 한 때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성공 등으로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다시 올랐지만, 오세훈 서울시장이 발의한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인하여 그야말로 나락의 길로 떨어지게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측했듯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투표율(33.3%에 미치지 못하는 25.8%) 미달로 개봉도 하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약속대로 '''서울시장을 사퇴하게 되었다'''.[* 홍준표 대표는 '사실상 승리' 운운하면서 오 시장을 달랬지만 끝내 독단적으로 시장직을 사퇴하는 바람에 홍 대표가 격분했다는 후문.] 이 여파로 홍준표 체제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최고위원이던 나경원 전 의원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웠지만, 20~40대 유권자들의 이반과 후보자에 대한 각종 의혹과 그에 대한 반박 등으로 인하여 여론이 나빠졌고, 결국 야권 단일후보인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1:1 정면 대결에서 패배하였다.[* 박근혜 전 대표가 선거를 돕지 않은 것도 한 몫 했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 여파는 커서, 당 내부에서는 백가쟁명식으로 당 쇄신 요구가 분출하기 시작하였고, 설상가상으로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선관위 공격 사건|선관위 DDOS 공격 사건]]이 벌어지자 당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여당은 그럼에도 [[남경필]] 최고위원이 위원장인 외교통상통일위원회 - 국회 본 회의에서 [[한미 FTA]] 강행 처리를 주도했으나 이 역시 야당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 민주당에게도 타격이 되었는데 막겠다고 공언한 한미 FTA가 통과되었기 때문.] 결국 12월 8일 남경필, 원희룡(당시 소장파), 유승민(당시 친박) 최고위원이 사퇴한 데 이어, 9일에는 홍준표 전 대표까지 사퇴하면서 최고위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cid=307102&iid=472635&oid=277&aid=0002709214&ptype=011|관련 기사]]. 이에 결국 박근혜가 구원투수로 재등판하게 되었다. 2011년 12월 말, 비대위가 설치되어서 위원장에 박근혜가 임명되었으며, 각종 쇄신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이 폭로되면서[* 현재는 잘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사실상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박희태]] 전 [[대한민국 국회의장|국회의장]]이 의장직에서 사퇴했을 정도로 여파가 컸었다.] 한나라당이란 브랜드 자체의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cid=831781&iid=26073849&oid=079&aid=0002320842&ptype=011|관련 기사]]. 결국 상황을 타개하고자 2012년 2월, [[미래희망연대]]와 합당함과 동시에 당의 이름을 바꿔 재결성하게 되었고, 기본적인 당헌과 규칙, 당원들은 [[새누리당]]이 승계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