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나라당 (문단 편집) === '[[잃어버린 10년#s-3|잃어버린 10년]]' === 그러나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자유민주연합]] [[김종필]]의 연대(일명 [[DJP연합]])에 패하면서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을 겪게 되었다. [[국민의 정부]] 출범 당시 161석의 과반 의석을 점하던 한나라당은 [[철새(정치)|철새]]들의 국민회의 및 자민련으로의 이적으로 과반의석을 상실하게 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상도동계]]와 [[민정계]], [[청구동계]] 중 반(反) 이회창 계열이 탈당했다. 그래도 친 이회창 세력의 민정계와 공화계, 상도동계 덕분에 제1당을 유지했고 통합민주당 출신까지 합해서는 안정된 의석을 유지할 수 있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16대 총선]]에서 예상[* 중진들, 것도 대개 영남권 중진들이 대거 탈락하는 공천 파동과 수도권의 강한 민주당세 때문에 고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선거 직전 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 실시를 발표하는 바람에 보수표가 대결집해 과반에서 고작 4석 모자란 133석을 얻었다.]을 뒤엎고 과반에 육박하는 제1당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사실상 승리하게 된다. 물론 민정계, 공화계, 상도동계의 원로 정치인들이 은퇴, 공천 탈락, [[낙선]]하였지만 다른 의원들의 상당수가 [[당선]]되며 한나라당 내 민정계와 상도동계, 통합민주당 계열 원로 및 중진들의 세는 크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신진 인사들이 재선에 성공하고 [[오세훈]], [[원희룡]]과 같은 향후 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되는 인물들이 이 시기에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당시 민정계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15대 총선]]보다 더 세가 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세를 과시하였다. 당시 한나라당에 남아 있던 민정계 정치인은 총 49명이었다. 당시 자민련이나 새천년민주당 세력까지 합치면까지 합하면 당시 국회 내에 남아있던 민정계와 공화계는 총 62명이었다. 비록 [[제15대 국회]] 때보다 더 세가 줄었지만, 국회 내에서 민정계와 공화계는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일부 의원들이 당선 무효 또는 [[대한민국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의원 직을 사퇴하거나 잃은 뒤 [[재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하였고, 연이어 정치 신인들이 탄생하거나 재선에 성공했고, 중진들과 원로들도 복귀했다. 또한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의 국회의원들이 한나라당으로 입당하며 의석이 최대 161석까지 늘어났다. 그리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압승을 거두었으나, 같은 해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16대 대선]]에서는 패했다. 이미 15대 대선부터 알려진 1996년 안풍사건, 1997년 세풍사건, [[총풍 사건]]의 "3풍"도 여전했지만 1997년 대선 말 기승을 부린 [[병풍 사건]]과 2002년 [[2002년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전달사건|차떼기]] 의혹이 그야말로 결정타였다. 이후 한나라당은 개혁 소장파들이 탈당했다. [[이회창]]은 16대 대선 패배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NP2.png|width=100%]]}}} || ||<:> [[파일:한나라.jpg|width=100%]] || 이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으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17대 총선]]에서 큰 위기에 몰린다. 중진들과 원로 정치인들이 많이 은퇴하거나 공천 탈락 또는 낙선했다. 이 때 한나라당 내에서 민정계 정치인들이 많이 없어지고 있었다. 같은 보수정당인 [[자유민주연합|자민련]]도 같은 상황을 겪었다. 하지만 여전히 민정계와 공화계, 상도동계의 원로 정치인들과 중진들이 무사히 당선되며 아직까지 그 중에는 민정계의 영향력만큼은 여전했다. 그리고 정치 신인들도 대거 탄생했다. 당시 살아남은 민정계와 공화계는 세가 줄어들었음에도 아직은 건재했다. 이에 자기반성 차원에서 기존의 당사[* 영등포구 의사당로 18 아시아원빌딩. 민자당 시절인 1994년부터 계획하여 한나라당이 결성된 이후 완공된 당사로, 기존에 건축된 건물을 구매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사로만 사용하기 위해 민자당에서 지은 당사다. 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자부할 정도로 큰 규모에다가, 총재 집무실에 샤워실까지 있었던 까닭에 호화당사라는 비판을 들었다. 이 9층짜리 당사는 대림그룹에서 인수했다가 2012년에 현대캐피탈로 소유주가 바뀌었고 리모델링을 거쳐 외관도 크게 달라졌다.]에서 천막당사--서커스장--로 잠시 옮겼었다[* 차떼기 사건으로 인한 부채를 갚기 위한다는 명목.]. 구 [[여의도 중소기업박람회장]] 부지로 이후 [[서울국제금융센터]]가 자리잡은 곳이다. 이후 일부러 조금 허름한 건물로 옮겼었다. 그 위치는 강서구 염창동 274-17[* 도로명주소는 공항대로 541.], [[등촌역]] 옆 [[LG전자]] 강서본점 자리다.[* 2019년 이후 해당 건물은 철거되었고 LG전자는 (구)화진화장품 부지로 이전했다.] 그러나 이런 [[흑역사]]를 뒤로 하고 천막당사 시절을 거쳐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05년 재보궐선거|재]][[2006년 재보궐선거|보]][[2007년 재보궐선거|선]] 승리로 다시 힘을 비축해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지금도 한나라당 내부에서 뭔가 일이 터지면 당의 일부에서는 '천막당사 시절을 생각하라!'는 투의 반성조의 발언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당 내부에서도 충분히 반성을 하고 되새겨 볼만한 과거였던 듯하다. 특히 2006년 지선의 경우 한나라당이 광역단체장 16곳 중 [[전라도]]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는 친야 성향의 [[김태환(1942)|김태환]]의 당선 덕분에 범야권 13석이 되었다.]를 제외한 12곳을 휩쓸고 기초단체장 155곳을 쓸어가며 압승했고, 광역비례 정당득표도 53.9%로 과반이다. 이후의 재보선에서도 연전연승했고 2007년 4.26 재보선 패배[* 엄밀히 말해서 패배도 아니었다. 범보수, 범야권 무소속 후보들이 선전한 선거였기 때문. 당시 열린우리당은 여기서도 참패를 하였다.]를 빼면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반전'으로, 이 천막당사의 임대료는 오히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당사 건물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천막 당사를 설치하기 위해 [[서울특별시]]에 임대료로 약 4,200만 원을 지불하였는데, 총 기간은 50일 정도였다. 반면 당시 열린우리당 당사의 건물 임대료는 월 2,500만 원선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에도 보여주기식 행사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으며, 부지 임대에 대한 서울특별시의 특혜 논란도 약간 있었다(당시 [[이명박|서울]][[오세훈|시장들]]이 모두 한나라당이었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