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화 (문단 편집) === 조선시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몽유도원도.png|width=25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암 화조구자도.jpg|width=28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정선 금강전도.png|width=207]]}}}||{{{#!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홍도 사계풍속도병 후원유연.png|width=298]]}}}|| || {{{-2 ''{{{#000000 '''《몽유도원도》 中'''[br]387 x 1065mm, [[1447년]], [[조선]], [[안견|안견(安堅)]]}}}''}}}. || {{{-2 ''{{{#000000 '''《화조구자도》'''[br]860 x 449mm, [[16세기]], [[조선]], [[두성령|이암(李巖)]]}}}''}}}. || {{{-2 ''{{{#000000 '''《금강전도》 中'''[br]1308 x 945mm, [[1734년]], [[조선]], [[정선(화가)|정선]]}}}''}}}. || {{{-2 ''{{{#000000 '''《후원유연》'''[br]1000 x 490mm, [[18세기]] 후반, [[조선]], [[김홍도]]}}}''}}}. || 현대 한국화의 특징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이때에도 채색이 화려한 그림은 여전히 그려졌으나, 사대부를 중심으로 유교의 질서를 반영한 문인화, 수묵화가 더 유행하였다. 특히 동기창의 남종화론의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문인화가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직업 화원이었던 [[김홍도]]는 남종화와 북종화를 넘나들면서 여러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조선시대 말에 이르면 [[장승업]]같이 중국식 도상을 따르는 방향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서민들은 [[민화]]를 향유했고, 조선 후기의 [[불화]]도 민화적 양식이 혼합되는 양상이 보여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