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화 (문단 편집) === 고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안악3호분 묘주.png|width=295]]}}}||{{{#!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수산리 고분벽화.png|width=31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강서대묘 주작도.png|width=300]]}}}|| || {{{-2 ''{{{#000000 '''《묘주 초상》 中'''[br][[안악 3호분]] 서쪽 곁방 정벽 벽화, [[357년|서기 357년]], [[고구려]]}}}''}}}. || {{{-2 ''{{{#000000 '''《묘주부부출행도》 中'''[br]수산리 벽화고분 널방 서벽 벽화, [[5세기]] 후반, [[고구려]]}}}''}}}. || {{{-2 ''{{{#000000 '''《주작》'''[br]강서대묘 널방 남벽 벽화, [[7세기]], [[고구려]]}}}''}}}. || 고대에도 한반도에서는 회화가 꾸준히 그려졌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무덤의 벽에 그려진 고분 벽화가 그려졌다. 현재 고구려 벽화고분은 100여점이 남아있으며, [[고구려]]의 사회, 귀족과 서민들의 생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학적 자료로 평가받는다. 한편 신라에서는 말안장의 장니 등에 [[천마도]], 신라 행렬도 등의 그림이 남았다. [[솔거]]의 이야기나, 다카마쓰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고구려 여인의 도상을 보아[* [[담징]]이 그렸다는 [[호류지 금당벽화]]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일본 쪽에서는 직접 당에서 전수받은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미 삼국시대의 회화가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작가론이나 화론이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