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화(북송) (문단 편집) == 생애 == 상주(相州) 안양현(安陽縣) 출신으로 957년에 한구의 아들로 태어났다. 977년에 진사로 급제한 한국화는 대리평사(大理評事)·노주통판(瀘州通判)으로 관직을 시작하였고 우찬선대부(右讚善大夫)로 승진하였다. 한국화는 이후 창덕군(彰德軍) 절도판관으로 제수되었고 저작좌랑, 감찰어사를 역임하였다. 986년, 한국화는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태종(송)|태종]]이 북정을 준비했고 고려가 [[요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자주 침략을 받자, 한국화는 태종의 명을 받아 태종의 조서를 가지고 고려로 파견된 것이었다. 한국화는 고려에서 돌아온 뒤 우습유, 직사관, 판삼사, 좌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991년에 요나라가 북송에 화의를 제의하자, 조정에서는 거란이 화의를 제의한 저의를 의심하여 한국화를 하삭에 사신으로 보내기도 했다. 한국화는 이후 형부원외랑, 병부원외랑, 둔전낭중, 도관낭중, 판대리시, 직방낭중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한국화는 경덕 연간에 다시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돌아와서는 강남 순무사로 임명되었으며, 태상소경으로 임명되고 지천주(知泉州)를 맡기도 했다. 1008년에는 우간의대부로 임명되었고, 1011년에 지천주로서의 임기를 마치고 복귀하던 도중 병에 걸려 건주(建州)의 객사에서 사망하였다. 한국화는 한구(韓球), 한선(韓瑄), 한거(韓琚), 한충(韓珫), 한거(韓璩), 한기(韓琦) 등 6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북송의 명재상으로 유명한 한기는 바로 한국화의 아들이었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957년 출생]][[분류:1011년 사망]][[분류:안양시(중국)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