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외국어대학교/서울캠퍼스 (문단 편집) === 구본관 === ||<-2>[[파일:한국외대 서울캠퍼스 구본관.jpg|width=100%]]|| ||<-2> {{{#ffffff 서울캠퍼스 구본관}}} || || '''건물번호''' || 0[* - 2004] → 4[* 2004 - 2009] → H[* 역사관] || || '''1단계 준공''' || 1957년 || || '''2단계 준공''' || 1959년 || || '''규모''' || 지상 3층 || [[한국외대]] 서울캠퍼스에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랫동안 존속했던 건물이다. 1954년 개교 이후 영보빌딩 임시교사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독자적인 캠퍼스를 갖추기 위해 정부에서 불하받은 이문동 부지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개발 과정에서 최초로 시공된 건물이 바로 구본관이었다. 시공 당시 가난한 국내 사정으로 인해 시멘트와 철근을 구하기 힘들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문교부는 직접 산업자원부에 공문을 발송하여 시멘트와 철근을 배급해 건물 완공을 도와주기도 했다. ||<-2>[[파일:한국외대 구본관 공사 단계.jpg|width=100%]]|| || {{{#ffffff 1단계 완공 직후 }}} || {{{#ffffff 2단계 완공 직후 }}} || [[1956년]] [[7월]]부터 구본관 공사가 시작되었다. 1년 동안의 공사 이후 [[1957년]] [[9월]] 우측 부분만 완성하는 1단계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2학기 개강 때부터 이문동 캠퍼스에서 강의가 시작되었다. 나머지 좌측 부분이 2년 후 2단계 공사를 통해 완성되면서 구본관은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은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서울의 일부분이지만 당시엔 [[이문동]] 전체가 사진처럼 논밭이었기 때문에 외대의 건물들만이 홀로 우뚝 솟아 있는 풍경을 이루었다. 구본관만 있던 시절에는 구본관에 각종 강의실부터 교직원 근무 공간까지 모든 시설들이 다 있었다. 그러다 [[1969년]] 제1교사[* 현 인문과학관]이 건설되면서 대부분의 강의시설이 이전되었다. 이후 제2교사[* 현 교수학습개발원], 사회과학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회관 등이 들어서면서 구본관에는 총장실과 행정 부서 등만 남게 되면서 구본관의 과밀화 문제가 비로소 해소되었다. 구본관 바로 뒤에는 미네르바 동산이 있었다. 또한, 당시 본관 바로 앞에 운동장이 있었다. 이 운동장을 활용하여 각종 행사[* 모의 올림픽 게임, 서강대 등 타 대학 간의 교류 운동회 등등]가 진행되었으며, 행사 때마다 단상은 본관 중앙현관 앞에 마련되었다. ||<-2>[[파일:임수경벽화.jpg|width=100%]]|| || {{{#ffffff 본관 좌측 날개의 임수경 벽화[* 참고로 사진 촬영 시점은 제2건학 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다.] }}} || {{{#ffffff 북한 기자단에게 전달된 그림 선물 }}} || 또한, 1989년 당시 용인캠퍼스 불어과에서 재학 중이던 [[임수경 방북 사건|임수경 학생이 무단으로 북한을 방문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좌측 날개의 외벽에 당사자의 벽화가 그려지기도 했다. 해당 사건의 여파로 임수경이 북한에서 아이돌(...)이 되는 바람에, 남북한 기자단 교류사업으로 북한 기자단이 1991년 남한을 방문했을 때 외대 캠퍼스 투어를 와가지고 구본관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갔다고 한다. 또다른 일화도 있는데 1990년에 이길성 [[로동신문]] 부국장을 포함한 제3차 남북한 고위급회담 북한 취재단 5명이 임수경 가족을 취재하다가 북한 기자가 남조선에서 가볼만한 대학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임수경의 언니가 외대 학교 건물벽에 수경이 그림이 있다고 말하니 북한 기자들이 '외대로 갑시다!' 하면서 그날 갑자기 캠퍼스 구경을 하겠다고 외대를 찾아왔다고 한다. 당시 학생회에선 [[평양외국어대학|평양외대]]에 전달해달라고 북한 기자단에게 그림 선물을 쥐여 줬다고 한다. 2000년대 이후 구본관이 상당히 노후화되면서 신본관 건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논의 끝에 구본관 바로 뒤에 있는 미네르바 동산 위치에 신본관을 건설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초기에는 도쿄국제포럼과 비슷한 디자인[* [[파일:한국외대 신본관 초기 디자인.jpg|width=80%]]]을 채택하였으나, 인근 주민들이 일조권 침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항의하면서 결국 현재의 디자인으로 수정하였다.[* [[파일:한국외대 서울캠퍼스 본관 신축 공사 입간판.jpg|width=80%]]] ||<-2>[[파일:짜리몽땅 외대 본관.jpg|width=100%]]|| ||<-2> {{{#ffffff 1단계 완공 이후 신본관과 구본관}}} || [[2001년]] [[3월]] 구본관 옆에서 기공식을 진행한 후 공사에 착수하였다. 신본관 공사에 따라 50여 년간 외대인들의 휴식공간이었던 미네르바 동산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본래 지하 3층, 지상 13층 규모의 신본관 전체를 [[2004년]] [[2월]]까지 완공할 계획이었으나, 원인 불명의 차질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전체 공사를 2개 단계로 나누어 1단계에 'ㄷ'자 모양의 하층부[* 지하 3층 - 지상 4층]를, 2단계에 나머지 상층부[* 5층 - 13층]을 완성하는 방향으로 수정했다. 이후 [[2004년]] 1단계 공사가 완료되었으며, 신본관이 본관으로서의 역할을 넘겨받았다. 본관의 역할을 넘겨준 구본관 건물은 당시 철거 예정이었던 구도서관 건물의 학생회관 역할을 넘겨받았다. ||<-2>[[파일:한국외대 신본관 2단계 완공 전후.jpg|width=100%]]|| || {{{#ffffff 신본관 2단계 공사 중의 모습}}} || {{{#ffffff 신본관 2단계 완공 이후}}} || 1단계 준공 2년 후인 [[2006년]]부터 2단계 공사가 시작되었다. 2단계 공사는 하층부를 폐쇄하지 않고 본관으로 계속 사용하면서 진행되었다. 2여 년 간의 공사 끝에 [[2007년]] 2단계 공사가 완료되면서 신본관은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08년]] 국제학사가 완공되면서 해당 건물의 1-4층으로 학생회관이 이전되었다. 이후 1년 동안 학교본부는 신본관 앞의 전면 광장 조성을 위해 구본관의 거취에 대해 논의하였다. 초기에는 구본관을 완전 철거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구본관의 역사적 가치가 상당하다고 판단하였기에 우측 날개의 일부를 남기만 남기고 나머지를 철거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또한, 철거가 완료된 이후에는 구본관 아래의 공간을 파내어 지하캠퍼스를 건설하고, 남은 구본관 건물 일부를 지하캠퍼스에 연결하여 역사관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2>[[파일:한국외대 역사관 공사.jpg|width=100%]]|| || {{{#ffffff 구본관 부분 철거 직후}}} || {{{#ffffff 지하캠퍼스 공사 당시 구본관 구조물}}} || [[2008년]] [[12월]] 철거 공사를 시작하여 [[2009년]] 초 오른쪽 날개 일부분만 남긴 채 철거를 완료하였다. 이후 이듬해 [[3월]] 지하캠퍼스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때 구본관의 경우 이른바 '띈바닥' 공법을 적용하였는데, 말 그대로 기둥과 보 등의 기본적인 구조만 남긴 채 모두 철거한 후 지하캠퍼스 공사 공간 확보를 위해 마이크로 파일을 박아 띄우는 방식이었다. 구본관 구조물이 붕 뜬 상태에서 지하 3층 규모의 지하캠퍼스가 건설되었으며, 지하 공사가 완료된 이후 구본관의 기둥을 지하캠퍼스 구조물과 연결하였다. 그리고 외관은 이전의 구본관과 거의 동일하게, 내부는 완전히 신식 인테리어를 적용하여 시공하였다. ||<-2>[[파일:한국외대 지하캠 준공식.jpg|width=100%]]|| 마침내 2011년 10월 지하캠퍼스와 역사관이 준공되었다. 이후의 역사관 현황은 역사관 항목을 참고할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