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여자프로농구 (문단 편집) === 탄생 === 출범 당시에 엄청난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차피 13개 구단을 다 끌고 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선수층의 향상을 위해서도 몇 구단은 해체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속도가 너무 빨랐고 해체 구단의 수가 너무 많았다는 점이다. * 1997년 4월 3일: [[한보그룹]] 부도 사태로 치명타를 입은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제일은행]] 여자 농구단이 해체. 이때만 해도 어차피 프로화에 금융권 구단이 동참하기 어렵다는 것을 남자 농구를 통해 봤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 1997년 8월 11일: [[태평양]] 여자 농구단이 [[신세계(기업)|신세계]]로 넘어갔다.[* 그러나 태평양의 주축 선수였던 [[김영옥(농구선수)|김영옥]]은 새로운 운영 주체인 신세계에서 안고 가려고 하지 않았고 그는 우여곡절 끝에 현대산업개발로 이적하게 된다.] 이때까지는 괜찮았다. * 1997년 11월 19일: [[한국화장품]] 여자 농구단 해체. 실업 팀의 첫 해체였다. * 1997년 12월 2일: [[코오롱그룹|코오롱]] 여자 농구단이 27년 역사를 끝으로 해체했다. * 1997년 12월 12일: [[외환은행 여자 농구단]]을 해체했다. * 1998년 1월 23일: [[대웅제약]] 여자 농구단이 [[농구대잔치]] 도중 해체를 통보했다. 그래도 이 시점에서는 13개 구단이 8개로 줄어든 상황이라 그래도 버틸 만했다. 애당초 프로화에 동참한 [[삼성생명]], [[현대산업개발]], [[SK증권 여자 농구단|SK증권]], 신세계, [[신용보증기금 여자 농구단|신용보증기금]] 정도에 한두 구단, 이를 테면 [[국민은행]] 정도를 끌어들이면 해볼 만하다고 본 것. 그래서 [[1998년]] 2월에 첫 리그를 출범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 1998년 2월 10일: 1997-98 [[농구대잔치]] 우승 구단 [[SK증권 여자 농구단]]이 '''우승 다음 날 해체를 통보했다.''' 이 결정이 치명타였다. 프로에 동참하기로 약속한 SK증권이 돌연 해체를 선언해 버린 것. 이 결정은 여자 농구의 쇠락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였는데, 왜냐하면 바로 직전에 [[SK그룹]]이 남자농구의 [[하이트진로|진로]] 맥카스를 무려 250억에 인수해서 [[SK 나이츠]]를 창단했기 때문이다. 남자 농구는 신생 구단[* 진로 맥카스는 선수 지명만 해놓은 채 모기업이 부도가 나면서 창단식도 못한 상태였다.]도 250억에 팔리는데 여자 농구는 우승 구단도 버려지는 상황... 미약하게나마 나아가던 프로화 움직임은 여기서 올스톱이 되었고 여자 농구단을 무더기로 해체하기 시작했다. * 1998년 2월 18일: 금융권 구조조정 상황에서 [[서울은행 여자 농구단]]이 해체되었다. 그래도 서울은행의 해체 선에서 간신히 수습하고, 해체 선수 드래프트를 했는데, 1순위인 정진경이 신용보증기금행에 대해 불복하고[* 신세계로부터 거액의 제안을 받고 입단 직전까지 갔는데, 드래프트에 포함하면서 일이 꼬였다고 한다.] 대만으로 떠나면서 열받은 신용보증기금이 7월 30일에 해체시켰다. 이로서 5개로 구단은 축소. 그나마 사정이 나은 금융 회사였던 [[국민은행]]은 구단을 존속시켰고 공적 자금이 들어간 [[한국상업은행]]은 가장 오래된 여자 농구 단이라는 그 타이틀 때문인지 차마 구단을 없애지 않고, 결국 프로화에 동참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1998년]] 7월 28일에 리그가 처음 시작했다. 하지만 한 번에 8개 구단을 해체하면서 나온 선수를 다 흡수할 수 없었고 이는 그 무렵에 졸업한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7명의 고교 졸업생들은 [[대만]]으로 [[귀화]]해서 농구를 이어가는 참담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