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어문회 (문단 편집) == 역사 == 한국어문회의 설립인가는 1991년이지만, 한국어문회의 역사는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정희 정부|정부]]의 한글전용 정책[* [[박정희]]는 '''한글전용 촉진 7개 사항'''을 공포하여 한글전용 정책을 밀어붙였다. 박정희의 7개 사항의 주된 내용은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문서 및 민원 서류와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서 한자를 없애는 것이었다.]을 우려한 인물들이 모여 국어국문학 학술연구와 '''국한혼용 어문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한국어문교육연구회'''를 창립하였다. 초대 회장은 일석 이희승 선생.[* 1896-1989. 국어학자, 시인, 수필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경험이 있으며,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생활하며 1962년에는 명예교수로까지 추대되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동아일보]]의 사장을 역임한 경력도 있다. 정계에서는 신민당{{{-2 ''([[신민당(1960년)]]인지 [[신민당(1967년)]]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과 한국독립당{{{-2 ''(아마도 [[한국독립당(1963년)]]으로 보인다)''}}}의 고문을 지냈고, [[유신 정권]]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물론, 이희승이 유신 정권에 반대한 것은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지향 때문이지 어문정책이 주된 이유는 아니다.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 않아도 역사적 중요성으로나 학문적 업적으로나 기념할 만한 인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D%AC%EC%8A%B9|위키백과 문서]] 참고.] 이후 '''한국어문교육연구회는 학술활동에 주력'''하고 '''한국어문회는 어문교육정책 및 어문운동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한국어문회가 한국어문교육연구회에서 분리되었다. 그 뒤에는 [[전국한자능력검정시험]]을 시행하기로 하면서 '''한국한자능력검정회는 전국한자능력검정시험 시행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한국한자능력검정회가 분리되었다.[* 한국어문회 홈페이지의 '본회연혁' 페이지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위와 같이, 韓國語文敎育硏究會는 학술활동에, 社團法人 韓國語文會는 어문교육(韓國語文敎育院)·어문정책·어문운동에, 韓國漢字能力檢定會는 전국한자능력검정시험 시행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한국어문회, 한국한자능력검정회 이 세 단체는 역사적으로 같은 모체를 공유하며, 법적으로 이사진의 일부 구성원을 공유하며, 사상적으로 같은 주장을 공유하며, 대외적으로 같은 로고를 사용하기 때문에 서로 같은 맥락에서 놓고 보아도 무방하며 다만 주력하는 분야와 역할은 다르다. 한국어문회에서 시행한다고 알려진 한자검정시험은 사실 엄밀히 말해 '한국어문회 주관 한국한자능력검정회 시행'이지만, 주관기관과 시행처를 구분하지 못해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단의 연혁은 한국어문회{{{-2 (한국어문교육연구회·한국한자능력검정회)}}}의 주된 활동인 '''국한문혼용 추진 운동''', '''전국한자능력검정시험 시행''', '''회보 발간''','''학술지 발간''', '''장학 활동''', '''시상 활동'''의 여섯 가지 활동을 중심으로 세 단체의 연혁을 추린 것이다. 사실 세 단체의 연혁은 한국어문회 홈페이지의 본회연혁 페이지에 합쳐서 서술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