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대학생선교회 (문단 편집) == 문제점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선교단체/문제점)] CCC가 설립 60년을 넘긴 오래된 단체이고 [[한국의 개신교]] 중흥역사를 같이 하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의 전형적인 문제점을 많이 답습하는 편이다. 교계 내외적으로 시선이 안 좋은 편. 어디까지나 교회가 아니고 선교단체에 불과한데[* 사실 말이 1개 선교단체이지 왠만한 대형교회와 지교회 수준으로 조직이 크다. 본부가 사랑방 등을 비롯해서 가진 부동산만 해도 상당한 수준. 물론 현금화가 곤란하기 때문에 현금이 많은 것은 아니다.], 일선 교회의 청년들을 교회 사역보다는 CCC 사역에 더 집중하도록 이끈다고[* 특히, 훈련 받은 순장 정도 되었으면 소속 교회 청년부와 CCC 양쪽에서 모두 사역이나 참여를 강요 받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PK(목사 자녀) 중에서 부모님이 학업을 이유로 둘 중 하나를 포기시켜, 자의반 타의반 떠나거나 둘 다 권유 받게 된다. 게다가 원 소속 교회가 CCC를 비롯한 선교단체에 대한 시선까지 나쁘면 상황이 심히 골 때린다.]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가뜩이나 요즘 개신교인 숫자가 줄어들어 일선 교회의 청년 일꾼 부족 현상이 심각해지니 그렇다.[* 물론 소속된 교회가 청년부 사역을 아예 안 하는 작은 교회라면 큰 문제가 없다만, 이건 젊은 인구가 없는 지방 이야기에 가깝다.] [[서울]]에 소재한 [[대학교]] C맨은 대놓고 [[간사]]가 "'''교회 그만두고''' 주일 채플에 나오라"고 하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과거 부암동 본부와 인접한 서울지구 '''[[한정]]'''이며, 기존에 소속된 교회가 있다면 그리 강요하지 않는다. [[지방]]에서는 거의 캠퍼스 및 지역과 연관된 교회 출석으로 연결시킨다. 특히, 지구 간사가 특정 교회의 교역자[* 교육목사, 협동목사, 강도사, 교육전도사 등]로 재직하고 있을 경우에는 간사 소속 교회로 많이 연결시킨다. 툭하면 [[이단]]소리 듣는 다른 독립 선교단체랑은 다르게 주요 교단에서 건전한 선교 단체로 분류한다.[* 일단, 최근 개정된 교재인 CRU.com과 CRU2에 희망을 걸어봐야 한다. 이 교재들이 만국 공용 교재인데, 이 교재 안의 내용은 주로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부분이 많은 편이며 즉 최근 신학의 추세를 어느 정도 따라간다는 점도 있다.] 그러니 IVF, JDM, DFC, UBF 등과 더불어 안심하고 가입해도 된다.[* 단, 인터콥이나 '''IYF'''는 주요 교단에서 [[이단]]으로 판명되었으니 크리스천이라면 절대로 가입하지 말자. 특히 IYF는 'IVF'와 유사한 이름을 걸고 포교활동을 하는 바람에 개신교, 천주교계 미션스쿨에서 이미지가 분탕종자 수준으로 굉장히 나쁘다.] 現 대표인 박성민 목사가 세습 문제로 경력이 좀 얼룩졌다. 박성민 목사가 [[김준곤(목사)|김준곤 목사]]의 셋째 사위이기 때문.[* 박성민 목사의 처는 [[김준곤(목사)|김준곤 목사]]의 3녀 김윤희 횃불트리니티신대원 총장. [[민수기]]와 [[신명기]] 등 구약 연구로 유명하다.] 본래 [[김준곤(목사)|김 목사]]의 후임은 경력 있는 원로 간사 중에서 나오리라 기대되었으나, 제대로 간사 과정을 거친 적이 없는[* 물론 CCC에서 순장을 지내긴 했으니 완전히 무관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목회학 및 신학 석/박사 과정은 '''장인이 총장, 아내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횃불트리니티신대원에서 이수했으며, 일선 현장에서 간사생활을 한 것이 아닌 CCC 본부에서 서울지구 책임간사, 기획조정실장과 전국 총무 간사를 맡았다. 따라서 캠퍼스에서 제대로 된 간사 생활을 하지 않았다.] 박성민 목사가 반쯤 낙하산으로 앉았기 때문에, [[2002년]] [[10월]]에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며 논란이 되었다. 결국 [[2003년]] [[2월]]에 박성민 목사가 신임 대표로 정식 임명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초부터 박성민 목사를 후계로 지명하려는 단계들이 포착되었다. 이에 반발하며 CCC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간사 및 순장들을 본부에서 내쫓았는데, 이 과정에서 반발한 이들이 CCC 간판을 버리고 DFC라는 새로운 단체를 차려 독립했고 그 과정에서 강원 4개 지구와 대전지구가 사라졌다가 다시 개척되었다. 결국 법적 분쟁까지 갔다가 해결되어 제자들선교회 [[DFC]]가 공식화 되었다. [[2000년대]] 초에 논란이 된 건 ''''[[계획대로|예상대로]]'''' 박성민 목사가 후계가 되었기 때문. 한국 개신교 세습 문제에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가볍게 다룰 일이 아니다.] 오늘날 가장 크게 비판받는 점은 군사 독재 시절, CCC가 권력 지향적인 행보를 보였다는 점으로, 그 [[박정희]] - [[전두환]] 정권과 유착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러시아 대사관 부지 일부를 CCC 회관 부지로 제공했고, 정권 차원에서 CCC가 [[1974년]] [[5.16]]광장(현 [[여의도공원]])에서 개최한 대형집회 엑스플로(Explo) 74의 행사진행를 돕기도 하였다.[* 개최 과정에 말이 많긴 하지만 이 '엑스플로 74'는 전후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중요하고, 당연히 개최 단체인 한국 CCC에게도 매우 중대한 사건이기에, 이후 여름 수련회를 비롯한 여러 행사에서 이때를 기린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7%91%EC%8A%A4%ED%8F%B4%EB%A1%9C_74|위키피디아 문서 참조]]] [[김준곤(목사)|김준곤 목사]]는 [[박정희]]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3선 개헌]]을 옹호하였고, 지금은 [[국가조찬기도회]]라고 명칭이 바뀐 대통령조찬기도회를 [[1965년]]에 만들었고, 더 나아가서 [[5.16 군사정변]]을 '''군사혁명'''으로 부르며 '''"하나님이 도우신 혁명"'''이라고 미화했다. 이후로도 여러 집회에서 반공을 강조하고 유신을 지지하여 유착관계를 지속했다. 이러한 상부상조(?)로 CCC는 국가의 전폭적 지지 아래 성장하였다. 여기서 변론을 조금 하자면, [[6.25 전쟁]]이 발발한 지 겨우 2달 정도밖에 안 되었을 때, [[전라남도]] [[신안군]]으로 진주한 [[북한군]]이 부친, 아내, 딸 등을 비롯한 가족들과 은인을 [[개신교]] 신자라는 이유로 학살하였던지라(물론 용서해주는 대인배의 면모를 보이긴 했다.) [[반공]]을 부르짖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관에 찬성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 반공을 부르짖은 건 [[박정희]] 뿐만 아니라, 인민군에게 사로잡혀 사형당할뻔 했던 [[김대중]], 소년병 출신 [[김영삼]]처럼 다른 정치인들도 매한가지였다는 것이다. 반면, 박정희는 엄연히 [[남조선로동당]]에서 군사 총책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국가전복사건에 관여하다가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사형판결까지 받았다가 전향하고 구명된 사람이고, [[남조선로동당]]이 [[한국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단 사실을 알았다면 더더욱. 더군다나 [[전두환]]의 [[대한민국 제5공화국]]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신군부]]가 [[광주광역시|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학살을 벌였음에도]] 석 달 뒤인 8월에는 [[전두환]]을 위해 기도회까지 열어주었다. '''CCC가 처음으로 개척된 지구가 바로 광주지구'''였음에도! 그리고 부암동 회관도 신군부의 도움을 얻어서 건립 허가를 받아낸 것이니. 백번 양보해 김준곤 목사가 박정희 정부가 반공이였기 때문에 본인 성향과 비슷한 것도 있겠으나, 광주에서 학살을 벌인 전두환을 위해 기도를 하고 신군부의 혜택을 받은 것은 CCC 최악의 흑역사로 꼽히기도 하는데, 이는 한국기독교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 중 하나가 '''[[5.18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이다. 부상자들을 종파 상관 안 하고, 치료했던 '''광주기독병원'''은 유명하고, 기독교 기관지로 유명한 '한국기독공보'[* 보수 성향 예장통합 소속의 기관지이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지이기도 하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한국 기독교계가 탄압을 받아가면서까지 활약한 사례를 상세히 설명하고 특집 기사까지 냈기 때문에 명백한 흑역사이다. 그가 사역했던 교회인 광주서현교회가 [[6월 항쟁]] 당시 광주의 [[명동성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군중들을 도왔던 점을 생각한다면 더더욱.[[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3/0000446968?sid=102|#]] 심지어 [[호남신학대학교]] 최상도 교수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5.18 항쟁기에 희생된 희생자들도 그렇고, 5.18 민주 묘소에는 기독교인이 많다(17%)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심지어 1980년 5월 30일, 6월 9일에는 5.18의 실상을 알리겠다고 기독교청년연합화(EYCK)[* 1976년 설립된 기독교 청년단체로, [[NCCK]]에 속하고 있다.] 소속 회원 2명이 투신과 분신을 통해 자결까지 해가면서 죽음으로 5.18을 알리기까지 했다. 5.18의 실상이 전세계 기독교계에게 알려진 것도 일본의 영향이 있다.[* 실제로 5.18의 실상을 해외언론에 맨 처음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는 북부독일방송의 도쿄특파원이였고, 개신교 차원에서는 일본의 한인교회인 도쿄 시나가와 교회 담임목사가 방문하고, 일본그리스도연합교회가 세계교회협의회에 이 5.18의 실상을 전달하기도 하는 등, 오늘날 [[5.18 민주화운동]]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기독교계를 비롯한 여러 분야 권위자들의 적극적인 협조도 한 몫을 했다. 김대중이 감옥을 갔을 당시 구명운동을 할 때도 일본 자민당과 일본민주당이 동시에 나서기도 했고.] [[http://pckworld.com/article.php?aid=8929660859|#]] 이런 흑역사가 있어서인지, 말년의 김준곤 목사는 [[국민의 정부]] 시기인 2000년에 들어서는 대북선교(젖소와 염소 보내기를 하던 곳이 CCC였다.)도 활발히 진행했다. 또한 다른 기독교 단체도 마찬가지이지만, 단체다 보니 율법에 빠질 염려가 있는데, 이를 테면 사영리 전도. CCC는 대학 캠퍼스 내에서 [[노상전도]]를 한다. 전도를 할 때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이라면 매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힘들 것이다. 전도란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치는 일이다. [[고린도전서]]에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린도전서 2:4-5)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아무리 믿음이 있는 신자라도 힘든 일인데, 믿음이 있더라도 사영리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한다면 사도[[바울]]이라도 전도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일이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영리는 선교 도구로 충분히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긴 하다. 4 points, The Four로도 전도하는데, 책자 종이가 접혀져서 더 친근하지만 이것도 사영리 기반이며, 사영리를 전하기 쉽게 요약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간사 후원 방식에 문제가 있다. 모든 선교단체가 후원을 받아 운영하지만, CCC는 다른 단체와 달리 더 엄격하고 제한이 있다. CCC 간사로 활동하려면 일정 이상 후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 CCC 방식이다. 하지만 일정 이상 후원금이 모이려면 [[바울]]이 [[하나님]]께 부름받아 세상 사람들처럼 일하고, 그들의 마음을 알기 위해 천막을 쳤듯이 간사들도 자기가 벌어서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데[* 협동간사 신분이 이런 케이스이다. 하지만 이런 협동간사의 신분으로는 한계가 있고 결국 전임간사로 교육받고 임직하는 이들도 많다.], CCC에서는 이를 막아버렸다. 물론 간사가 믿음으로 단체에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단체들과 달리 간사가 개인으로 일하고 돈을 버는 일을 할 수 없게 한 것. 즉, 간사가 후원금을 지원받지 못하면 활동하기가 심히 어렵다. 이런 생활고를 이유로 간사를 그만두는 분들도 있을 정도. 그래서 중간에 휴직하고 신대원을 가시는 간사님들이 종종 나온다.[* 간사로서의 삶이 어렵기 때문에 가정을 부양하려면 파트타임 교육전도사 - 강도사 - 교육목사 생활이라도 해야 하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