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겨레 (문단 편집) === 설립 이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532328_STD.jpg|width=100%]]}}} || || 1987년 동아일보에 실린 한겨레 창간 광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2938196_20060101.jpg|width=100%]]}}} || || 한겨레 로고의 변천사[* 참고로 위의 내용에는 오류가 있는데, 두 번째 로고는 1995년이 아닌 1994년이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publishDate=1994-05-15&officeId=00028&pageNo=1|1994년 5월 15일자 신문]]][* 2006년 로고 변경 당시 기사에 나온 자료로, 2011년부터 '레'의 ㅔ가 약간 달라졌다.] || >대선 전 한 달 동안 10억 정도를 모았었죠? 그러던 것이 오히려 대선이 끝난 이후 두 달 만에 40억 가까이 쏟아져 들어왔으니까. 참 그때의 감격이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어떤 날은 하루에 2억씩 들어왔다니까요?''' 이건 뭐 농담이지만 그때 우리까지 그런 얘기도 했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한 2백억 모으겠다고 할 걸... (웃음) 실제로 그 때의 열기로 봐서 50억에서 마감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2백억까지도 단숨에 달려갔을 거예요! 그때 우리 국민들, 참 대단했습니다. >---- >당시 창간기금 모금 총 책임자였던 이병주의 증언. 원 출처: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 한겨레신문 10년의 이야기> - 이민우, 심산 저. 한겨레신문사. 1998. p65~66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어리석은 꿈'에 합류한 사람들이 있었다. 월급은 반으로 줄고 일은 두 배로 늘어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 발로 찾아온 정신 나간 사람들이었다. 촌지와 맞바꾼 자존심을 안주 삼아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현실을 개탄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언론과 세상이 본래 그럴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에 대하여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신문만 만들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 > 원 출처: 위의 책 p8~9 프롤로그 중에서. 위와 같은 정치/사회적 변화 속에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리영희]] 교수와 임채경 [[창작과비평사]] 편집고문, 이병주 동아투위 위원장, 정태기 조선투위 위원장 등 네 분이 1987년 여름부터 구상을 하여 과거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을 중심으로 기자들이 다시 뭉치고, 모자란 자본은 6만 7300여 국민들의 자발적 후원 형식인 국민주주제로 채워졌다. 창간의 움직임은 그해 10월부터 낸 창간준비 소식 및 모금운동 광고의 형태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광고에 실린 카피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는 1987년 대선에 야권이 패배한 뒤 실의에 젖어 있던 국민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모인 50억원의 자본금[* 이 중 2억원은 당시 부산지국 창간 발기인으로 활동하던 부산지역 인권 변호사 1명이 기부한 돈이다. 그 기부자는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이 되는 '''[[문재인]]'''이다.]으로 [[1987년]] [[12월 15일]]에 신문사를 차렸고, [[1988년]] [[5월 15일]] 1호가 나왔으며, 기존의 활판인쇄 대신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신문편집 시스템이었던 [[http://mdl.dongascience.com/magazine/view/S198908N022|'2세대 CTS']]를 도입하였으며 한 사람의 주식을 1% 이상 소유하지 못하게 하여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신문을 지향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journalist.or.kr/17500_11658_4548.jpg|width=100%]]}}} || (한겨레 신문 창간호)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8-05-15&officeId=00028&pageNo=1&printNo=1&publishType=00010&articleId=1988051500289101001|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보기]] 한겨레는 [[1988년]] [[가로쓰기]]와 순한글표기를 시작함으로써 1947년 [[호남신문]], [[1985년]] [[스포츠서울]]에 이어 대한민국 일간지로는 3번째, 종합일간지로는 두 번째로 가로쓰기 지면을 선보였다. 호남신문이 지방지인 관계로, 중앙 종합일간지로 한정하면 첫번째가 된다. 종합일간지가 대대적으로 가로쓰기를 시작한 것은 한참 후인 [[1995년]] [[중앙일보]]의 가로쓰기 도입 이후로 평가된다. [[경향신문]]도 중앙일보보다 더 늦게서야 가로쓰기로 전환했고, 한겨레와 비슷한 시기에 가로쓰기 전용을 선보인 [[국민일보]]도 얼마 후 별로 좋은 방식이 아니라 판단하여 회귀한 바 있다. 한겨레가 큰 영향력을 끼친건 아니더라도 가로쓰기 전용을 시도한 초창기 신문임은 사실이다. 원래 우리 문화에서는 예부터 전통적으로 [[세로쓰기]]를 사용했었고, 가로쓰기는 서양의 영향이 적지 않으므로 가로쓰기가 우월하냐 세로쓰기가 우월하냐 하는 병림픽은 벌이지 말자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핵심과 다소 동떨어진 견해이다. 현대 한국에서 서구화된 교육이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이미 1950년대 말~1960년대부터 초중등학교의 [[교과서]]는 가로쓰기를 사용하였고, 1970년대부터는 대부분의 대학 교재들 역시 가로쓰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즉, 우수성과 관계 없이 신문을 읽을만한 지식 계층의 상당수가 가로쓰기에 익숙해져 있는 상황에서는 가로쓰기의 가독 효율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 한겨레 창간 제호 표기도 한글로 했는데 한글 제호는 [[한국일보]]가 1954년 창간때부터 이미 해왔다. 또 납활자가 주류였던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신문편집 시스템이었던 '2세대 [[CTS]]'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http://dl.dongascience.com/magazine/view/S198908N022|#]] 이 시스템은 원고를 컴퓨터로 입력한 뒤 손으로 기사를 이어 붙이는 원시적인 1세대와는 달리 교정, 면 배치, 출력까지 컴퓨터로 처리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사진, 광고, 기사 컷(큰 제목) 등은 사람 손을 거쳐야 했다. 세계 언론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주를 통해 자본을 마련한 언론이기도 하다. 2만 7천여명 주주가 모아준 50억원의 성금으로 설립되었으며 모금에 참여한 국민들에게 한겨레신문사의 주식을 배정해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게 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때문에 회장이나 이사회가 없고 늘 1인 1주로 처리된다. 다른 신문들이 [[한자]] 병기를 하는 것과는 달리 한겨레신문은 순 100% [[한글]]로만 사용하며 한자로 표기하는 일이 없다. 심지어 영어도 쓰지 않는다. 예를 들어 [[KBS]]를 부를 때 다른 모든 신문은 그냥 [[KBS]]라고 쓰지만 한겨레신문에서는 '한국방송'이라고 쓰고, MBC는 '엠비시', 또는 '문화방송'이라고 쓴다. 초대 사장은 동아일보에서 퇴사한 당시 편집장이었던 청암 [[송건호]]. 이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 행각을 공개하면서 인기가 상승한다. 이미 1980년대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상호 간에 친일신문이라고 비방한 전력이 있다. 나중에 한겨레가 이를 토대로 두 신문 모두 친일신문으로 규정하면서 [[자승자박]]이라고 평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한겨레의 출발은 순탄치 못하였는데, 창간 이후부터 노태우 정권에게 눈총을 받아 [[청와대]] 기자실이 비좁다는 이유 아닌 이유로 청와대 출입을 거부당했는데, 이는 1991년 춘추관 완공 때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1989년 9월 초 [[안기부]]가 본지 독자들의 성향을 파악한다며 구독에 간접적 압력을 주기도 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100400289111001&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89-10-04&officeId=00028&pageNo=11&printNo=429&publishType=00010|#]] 한겨레 역사상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은 것은 1989년 4월 14일 리영희 논설고문이 방북취재 혐의로 안기부에 구속된 사건부터였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 하에서 방북취재 계획을 빌미로 한겨레를 권력에 굴복시키려 했으나, 이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또 7월 12일에는 [[서경원]] 방북 사건 당시 [[윤재걸]] 기자가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기부 요원들과 전투경찰에 의해 한겨레 편집국이 압수수색되었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국민 성금이 1백억 원 이상이나 몰려들어 한겨레는 그 모금을 바탕으로 일약 중앙지로서의 지위로 올라섰다. 다만 창간 이후로도 사세를 크게 넓히지는 못해서 당시 4대 중앙일간지였던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에게 발행부수에서 크게 밀렸다. 이는 1990년대 당시에는 [[동아일보]]가 2010년대 경향신문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고, 지면수도 많은 데다가 쌓아올린 노하우를 무시할수없다보니까 당대 진보 독자들은 동아일보를 구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199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신문에 한자를 섞어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한자를 많이 아는것이 교양의 척도였던 시절인지라 상대적으로 없어보이기까지 했다는 점도 강했다. 2001년 '심층해부 언론권력' 시리즈로 조선, 동아일보 등 족벌언론의 '무한권력'과 '추악한 과거'를 고발했다.[[http://www.hani.co.kr/section-special/200103press.html|#]] 이때문에 조선, 동아일보에게 각각 70억원, 10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당했으나 2008년 2월 14일 대법원에서 조선, 동아일보의 청구를 기각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특히 2심 재판부는 "한겨레의 보도·만평은 국내 중요 언론사의 과거를 재조명함으로써 비대화되는 언론권력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권-언 유착과 친일 행적을 다루고 있어 보도의 공익성이 인정된다"고 할 정도였다. 언론사로는 처음으로 신문에 쓰는 [[글꼴]]인 한겨레 결체를 공동으로 개발하여 2005년 5월 16일 신문부터 이 글꼴을 적용하고, 사람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참고로 한겨레 결체는 일간지 최초의 '탈네모글꼴'이다. 탈네모글꼴은 문자 그대로 '네모'(정사각형)에서 벗어난 형태라는 뜻의 한글 타이포그라피 용어다. 사실 기존의 명조체는 한문 해서체의 특징을 그대로 가져온 형태로 한글의 초성+중성+종성으로 구성된 조형원리와는 동떨어진 글꼴이다. 이 '초성+중성+종성'의 조합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안상수의 '안상수체'인데, 한글 타이포그라피에서 '탈네모'란 대단히 중요한 발전이다. 안상수는 '안상수체'의 개발로 '구텐베르크상'을 수상했을 정도다. 한겨레 읽다 조선일보 읽으면 조선일보 글꼴이 굉장히 넓적해보인다. '''2016년 9월경 미르와 K스포츠재단의 최순실에 관한 첫 기사를 낸 적이 있다.[[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61796.html|#]]''' [[박근혜 탄핵|이후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오게 되는데..]] 보통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말하면 [[JTBC]]를 먼저 떠올리지만 최순실을 가장 먼저 언급한건 한겨레였다. 다만 취재는 [[TV CHOSUN]]이 가장 먼저 했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0/25/2016102503217.html|#]][* TV조선이 가장 먼저 접근한 게 맞다. 청와대가 조선일보 주필을 날려버리며 응징하자 조선이 입을 다문 것.] 한겨레의 [[김의겸]][* 2017년 퇴사했으며, 이후 [[대통령비서실]] 대변인을 지냈다. 2021년 현재는 [[열린민주당]] 소속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임기자가 쓴 칼럼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님께'를 읽어보면 한겨레의 역량 한계에 대한 해당 기자의 안타까움과 조선일보의 능력에 대한 기대감을 느낄 수 있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3217.html|#]] 이후 별다른 특종들과 세밀한 분석들을 내놓지 못하고, JTBC가 태블릿 PC를 터뜨리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주도권을 가져가 버렸다. 2019년 11월 [[n번방]] 사건을 단독으로 취재하여 보도했는데, 차츰차츰 알려지다가 3월에 가서 뒤늦게 터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