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학원 (문단 편집) === 1980년대 === 1980년 [[7월 30일]] "7·30교육개혁조치"가 발표되어 재학생의 과외 교습 및 입시 목적의 재학생 학원 수강을 금지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학생의 학교 외 수업이 금지되었다. 다만 재수학원은 학원 금지 조치에 해당하지 않았다. 또한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경감한다는 이유로 일선 학교들의 보충수업 및 야간자율학습도 전면폐지되었다. [* 물론 일선 학교 현장에서는 특히 사립학교에서는 계속 시행되고 있었던 경우도 많았다.] 1980년 7·30 조치 발표 직후 [[재수학원]]과 미술, 피아노, 태권도 등 예체능 학원외 나머지는 모두 문을 닫았다.[* 이 때문에 [[맨투맨영어]]가 생기게 되었다.] 7·30 조치 발표 이후 학원은 재학생들의 환불로 쇄도를 이뤘다. 과외단속 전담반이 운영되었고, 과외단속반에 적발된 학생, 과외교사, 학부모, 해당 학교 등에게는 강력한 제재가 취해졌다. 1980년대 당시 학원 수강이 적발된 재학생은 무기[[정학]] 내지는 [[퇴학]]이라는 중징계를 당했고 그 부모가 [[공무원]]인 경우에는 면직을, [[교사]]나 [[교수]]인 경우 교직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여기에 명단 공개는 덤이었다. [[1962년]]~[[1976년]]생[* 여기에는 [[1977년]] 1~2월생 및 조기입학한 [[1977년]]생도 들어가며, 간혹가다가 [[1961년]] 혹은 그 이전 출생자가 끼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들은 대학교 학번으로 치면 81~95학번이었다. [[대학입학 학력고사]] 세대들은 모두 여기에 들어갔고 [[대학수학능력시험]] 세대도 극 초반이라면 여기에 들어가며, [[교복]] 자율화 세대와도 완전히 겹친다. 이들은 대부분 [[음력]]으로 [[생일]]을 지냈다고 한다. [[유재석]] (1972년 8월 14일생)과 [[신현준]] (1968년 10월 28일생), [[최태성]] (1971년 7월 16일생), [[전한길]] (1970년 8월 21일생) 등이 이런 케이스에 걸렸다.]이 여기에 걸렸으며, [[1967년]]~[[1971년]]생들은 중고교 6년 동안, [[1964년]]~1971년생은 고등학교 3년 동안 학원을 못 다닌 셈.[* 가끔 [[1963년]]생이 포함되기도 한다.] 특히 여기서 [[1967년]]~[[1971년]]생은 정중앙에 걸렸다. 현재 [[386세대|586세대]]의 상당수와 90년대 초반 학번들은 최소 고등학교 1년은 학원 없이 공부해야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1962~1976년생인 사람들 가운데는 과외를 한 적은 있어도 과외를 받은 적은 없었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정부]]에서 학원을 대대적으로 때려잡을 것을 선언하고 나섰지만 덩치 큰 종합 학원 원장들은- [[교육청]] 관계자들과 사이좋게 [[술]] 마시고[* 심지어 전국 10위권 안의 대형 학원장이 [[안양시|시장인 곳]]도 있다!], 서로 [[형님]] [[아우]] 하면서 유착되어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탄압 대상은 [[화폐|돈]]이 없는, 그냥 삼시세끼 밥 겨우 먹는 학원들. 한마디로 영세학원만 죽어났다. 하지만 당시 정부가 뇌물먹고 재수학원만 풀어 준 것이 아니라, 재수학원은 규제하고 싶어도 규제할 수가 없었기에 풀어준 것이었다. 당시 정부는 모든 사교육과 학원을 다 때려잡고자 했으나 재수학원만은 규제할 수 없었는데, 왜냐면 재수학원은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고등학교까지 졸업했고, 투표권도 있는 성인에 대해 정부가 규제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80년대에는 재수학원만 허용되었던 것이다. 뇌물을 먹었다면 차라리 재수학원을 때려잡고 재학생 학원을 풀어줬을 것이다. 왜냐면 70년대말 대한민국 최대의 입시학원들은 고등학생 대상의 대일학원, 서울학원 등 단과 학원이었고, 재학생 학원 숫자가 재수학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종로학원, 대성학원 등 재수학원은 단과 학원보다 규모가 작았다. 1980년 전면 금지되었던 학교 보충수업 및 야간자율학습은 이후 학습 부진 학생들을 구제한다는 이유로 1982년부터 허용되었다.[* 많은 학교가 사실상으로는 1980년 1981년에도 시행하고 있었긴 했다.] 이후 대부분의 학교들이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을 부활했는데, 1986년 이미 전국 고교 74.9%가 보충수업을 실시하며, 87.3%가 야간자율학습을 실시한다는 통계가 나왔다. 학교들은 과외 금지 조치 때문에 보충 수업 실시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1988년 보충수업은 완전히 자율화되어 각 학교가 교육청의 감독 없이 자율적으로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일선 고교들이 앞다투어 보충학습과 야간자율학습을 실시했던 것은 아래 나오듯 교사들의 주요 부수입이었기 때문이고, 또한 입시 성과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당시 보충수업과 야자를 억제하려 했던 정부 정책과 달리 일선에서 보충수업과 야자가 사실상 강제화되자 이는 많은 학생들의 불만과 반발을 불러왔다. 당시 학생들은 이게 전부 전두환 군사 정부 때문이라 생각하며 정권에 불만을 품었다. 지금도 586세대들은 당시 야자를 강제한 게 전두환 정권 탓으로 잘못 알고 있다. [youtube(bLOaj9O69R0)] 1980년 모든 학원과 과외가 금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초기를 제외하면 과외 단속은 차차 느슨해져 할 사람들은 다 알아서 암암리에 과외를 했었다. 80년대 재학생 대상 입시 학원은 불법이었지만, 대신 80년대 유행했던 학원이 '주산학원'이었다. 상고 등 실업계 학교들을 위한 실용 학원이었기 때문에 입시 학원 금지 대상에 적용되지 않았다. 이렇게 실업계를 위한 학원인 주산학원이지만 80년대에 동네에 지금의 보습학원처럼 흔했던 것이 주산학원이었고, 그 대상도 실업계 고등학생이 아니라 초중고교생, 그중에서도 특히 초등학생들이었다. 주산을 통해 암산 능력을 키울 수 있어 수학 실력이 는다고 홍보했고, 학부모들도 수학 실력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자녀들을 주산학원에 보냈다. 실제로 80년대 국딩의 다수가 주산학원에 다녔다. 80년대 초반 서울시내에만 주산학원이 7000여곳이었다고 한다. 주산학원에서는 형식적으로 주판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산수/수학을 가르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이 경우 단속에 걸리기도 했지만 80년대 후반[* 대략 87년 88년 경] 규제가 느슨해지면서 생겨난 것이 속셈학원이었다. 주산학원의 진화, 업그레이드판인데, 속셈학원은 주산학원보다 노골적으로 수학을 가르쳤다.[* 국어나 영어를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암산 기술만 가르친다 하여 역시 규제를 피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속셈학원이 보습학원의[* 95년 5월 보습학원이 인가가 나기 전에는 속셈학원 간판으로 보습학원식으로 운영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 전신이기도 한 경우도 있다. 80년대 중반부터는 소득 수준이 급격히 높아짐에 따라 피아노, 미술, 태권도 등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예체능 학원이 크게 성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주산학원과 마찬가지로 입시 학원이 아니었던 웅변학원이 국어학원을 대신하여 인기를 끌었고, 또 80년대말 퍼스널 컴퓨터(PC)가 서울 중산층 가정에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컴퓨터학원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렇게 학교 교과와 직결되지 않은 여러 형태의 학원들이 생겨나 성행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학원이 금지된 상황에서 초등학생들이 가정에서 예습, 복습 등 자율학습을 돕는 가정학습지가 유행했다. 점차 가정학습지의 방문교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외가 금지된 상황이었기에 처음에 방문교사들은 학습지를 배부하고 가져가는 역할을 했으나 8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채점을 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기도 했다. 또한 학원과 과외가 금지되면서 주로 집이나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자습(자기주도학습)을 해야했기 때문에 자습을 위한 자습서, 전과류의 참고서가 흥하기 시작했다. 70년대까지는 학원 강의를 전제로하여 설명이 불친절한 [[성문영어]]시리즈가 독보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80년대에는 학원과 과외가 금지되어 자습으로 공부해야 했기에 아주 상세한 설명이 더해진 [[맨투맨영어]]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또 사회, 과학 과목의 상식 보충을 위한 백과사전류가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