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후현 (문단 편집) == 평가 == 일찍이 수재로 이름났고 학자로서 학식이 뛰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정파의 [[하안]]처럼 현실과 유리된 유약한 책상물림 서생이 아니라 현실 개혁 정치가로서도 충분히 능력을 갖췄다. 중호군 시절 그가 천거한 인사들이 모두 준걸로 인정받아 상당수가 고위직에 올랐다는 기록이 남은 걸 보면 정치가로서의 자질 또한 검증됐다. 또한 정국에 주어진 문제점을 정확히 집어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식견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안이 완벽한 대안이라고 보기엔 어려웠고 오히려 폐단을 부를 수도 있었으며 또한 그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추진력 혹은 권력 정치적인 면모(정쟁이든 군사적 역량이든)가 모자랐다. 구상력에 있어서 그는 자신의 식견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개혁정치를 하려고 애썼으나 이런 면모는 하후현의 뼈 아픈 단점이었다. 이는 그의 매부이자 한때의 동지, 그리고 최후에는 적이 되어버린 [[사마사]]와는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만약 그와 함께 했던 조상 일파 가운데 하후현의 이런 단점을 보완해줄 인물, 하안과 하후현이 입안한 개혁안의 현실적 문제점을 지적하며 같이 고쳐나가고 이를 관철할 역량이 있는 중량감을 갖춘 거물이 있었다면 하후현도 자신의 뜻을 널리 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금수저 도련님들 혹은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먼 학자 성향의 인물들만 포진된 조상 일파엔 그런 인물이 없었다. 정말이지 하후현의 파트너가 조상이 아니라 조상의 아버지인 [[조진]]이었다면 조위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준급의 군재와 두터운 인망, 충성심, 정치력을 겸비한 조진이 그때까지 살아있었다면 최소 하후현이 입안한 여러 개혁정책들을 시도라도 해봤을 공산이 크다. 사실 조상이나 하안 역시 자신들의 그런 한계를 절감하고 카리스마와 추진력을 갖춘 사마사와 사마소 형제를 자신의 일파로 포섭하려는 시도를 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하후현 역시 사마의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개혁안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사마의라는 조위 최고의 거물이 우국충정의 마음을 갖고 당파를 초월해 조상 일파와 협력해 조위의 폐단이 어느 정도 수정됐다면, 후일 서진의 비참한 말로와 [[오호십육국시대]] 도래로 인해 중화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질 일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러나 당시 정세로 보면 군웅할거로부터 위촉오 3국이 세력 확장과 오랜 전쟁,살상으로 중국 자체가 피폐해진데다가 이미 후한 말 [[당고의 금]] 사건 때부터 중앙정부는 있으나 마나 한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로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간 통에 중앙 권력의 통치력이 급감한, 위촉오 중앙 권력보다 거대 호족사회가 장악한 인구가 몇 배나 많았고[* 물론 [[촉한]]은 특유의 건국 정체성과 유비-제갈량으로 이어지는 정계 라인이 중앙 집권화의 완성을 이뤄냈기 때문에 위나 오에 비해서는 더 나은 상황이었다.], 호족의 우두머리 격인 [[사마의]]조차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던 당대의 현실을 일부 중앙 개혁 세력의 분발 정도로 극복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