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후현 (문단 편집) === 하후현, 개혁을 주장하다 === 아무튼 하후현은 이 무렵 [[사마의]]와 이야기할 때 장문의 편지를 써서 [[구품관인법]][* [[진군#s-2|진군]]이 만든 그것으로 구품중정제라고도 한다.]의 폐단과 당시의 사치풍조를 비판하고 당시 위나라 정치의 폐단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이를 시급히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그에 대한 보완책을 건의하였다. 특히 당시 위나라를 대표하는 인재 선발 제도인 구품관인법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눈길을 끄는데, 이는 뒷날에도 "상등 관품에 한미한 출신이 없고, 하등 관품에 권세가 출신이 없다(上品無寒門 下品無勢族)"며 비판을 받게 되는 이 제도의 치명적인 결함에 대한 본격적인 첫 공격이었다. 인재선발의 기준이 모호하고, 선발된 인재에 대해 선발관이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파벌 양성의 부작용이 심하다는 것 또한 지적사항이었다. 후에 [[서진#s-1|서진]]의 중신이 되는 [[위관#s-3|위관]]이나 [[두예#s-1|두예]]의 비판도 거의 같은데, 하후현이 일찍부터 이를 지적한 것이다. 그는 도관고과법을 도입해 공과로 관리의 재능과 자질을 평가해 조조 시절의 유재시거의 기풍을 부활시키려 했다. 관장들에게 각자 소속 관리들의 능력 혹은 열등함을 정부에 보고하도록 하며, 정부에서는 관장이 보고한 것에 의거하고 마을에서의 덕행 순서를 참고하여, 각급 관원의 등급과 비교하여 치우침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으며 중정관은 그들의 행동 자취를 고찰하여 그것의 높고 낮음을 판별하고, 등급을 심사하고 결정하여 관직의 승진과 낮춤에 있어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해야한다고 했다. 조정에서 전면적으로 관여해 착오가 있다면 그 책임은 당연히 조정의 담당관리가 지어야 하고, 장관의 등급 배열과 중정의 순위는 응당 실제 수용의 순서에 알맞게 그들을 임용해야 되는데, 만일 그 인물이 부적격한 경우에는 책임은 조정 밖에서도 져야된다. 이와 같이 조정의 안과 밖이 서로 자료를 참조하여 인물의 장점과 단점의 판정 근거가 세워지고 쌍방이 항상 검사하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하후현은 지방의 관료 및 통치 조직이 난잡하게 변질되었음을 지적하고 꼭 필요하지 않은 행정단위를 폐지하거나 통합하자고 주장했다. 중복되어 있는 군수를 감량한다면, 현의 일은 주에 빨리 도달할 수 있게 되어 정사에 틈이 생기지 않으며, 관원들도 머물러 적체되는 것이 없게 되어 행정의 간소화와 단일화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 지방관들의 업무가 중복되거나 연계되지 않는데도 굳이 수많은 태수와 자사직을 설치하면서 발생한 경제적 부담이나 비효율적인 행정 절차를 줄이고자 한 의도였다. 이때 하후현은 행정단위를 통폐합하여 얻을 수 있는 이득으로 첫째로 업무가 중복되는 관리들을 줄여 재정에 도움을 주고, 둘째로 행정 절차를 간결하게 하여 효율적으로 만들며, 셋째로 지방관이 어느 한두 고을만을 편애하는 현상을 막아 혼란을 줄일 수 있고, 넷째로 유능함에도 불구하고 낮은 직위에 있던 관리를 새로 임용하여 중임을 맡길 계기를 만들며, 다섯째로 관리들의 유능함과 무능함을 평가하는 일관된 제도를 병행하여 보다 청렴하고 올바른 정치 체제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등의 근거를 제시했다. 하후현은 이 과정에서 군의 태수를 제거하고 대신 자사만을 임명하여 지방행정 권력을 자사에게 몰아주는 형태를 구상했는데 이는 어느 한 관직에 권력을 몰아주는 형태상 한 관직에 권력의 쏠림이라는 부작용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후현이 군의 태수를 폐지하자고 한 건 아니었다. 하후현은 지금의 군수가 관할하는 범위는 대체로 주와 같으며, 이 양자는 중복될 필요가 없기에 현재의 군수는 폐지해야 한다고 역설한 후, 군의 태수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군과 현을 병합하고, 현리로는 청렴하고 선량한 자를 많이 선발하여 임무에 임하게하며, 1만 호의 현을 다스리면 군수의 이름을 주고, 5천 호 이상을 다스리게 하면 도위의 이름을 주며, 5천 호 이하를 다스리게 하는 것은 지금까지처럼 현의 영장으로 하고, 작은 현의 장관인 장 이상은 공적에 따라서 자리를 옮겨주고, 능력이 있으면 승진하고 다스리는 곳도 그에 따라서 확대시키라는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후현의 개혁 정책은 현 관료들의 사치스러운 풍조를 비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지나치게 화려한 것을 숭상하는 황실의 법도를 옳지 못하다고 여겨 보다 검소한 예식을 도입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덧붙였다. 그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아진다는 생각으로써 황실에서 먼저 검소함을 추구한다면 그 아래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허례허식을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정부 권력의 지방 분산에 대해서 건의하기도 하였지만, 사마의는 하후현의 열정적인 정책 건의를 받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관리를 심사하여 적임자를 선발하자는 의견과 중복되는 관직을 생략하고 복식제도를 개혁하자는 의견은 모두가 썩 좋은 것이오. 예절에 있어 마을에서는 본인의 행적을 품평하고, 조정에서는 각급 관원의 일을 고찰하게 하는 것은 그 기본적인 취지가 그대가 나타낸 바와 같소. >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중간의 시대에서 (제도를) 이어받아 실시한 이상, 다른 제도로 갑자기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오. 진(秦)나라 때는 자사(刺史)가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군수(郡守)와 장리(長吏)만이 있었소. 한(漢)나라 때 처음으로 자사를 두었지만, 군(郡)에 대하여 단지 여섯 개 항목에 대해 사찰하는 정도일 뿐이었소. 그래서 자사의 일을 전거(傳車)에 비유하였고, 그에 속한 관리가 종사(從事)로 불렸던 것이오. 자사에게는 일정한 부서나 관청이 없었으며, 거기에 속한 관리들 또한 정식 관원이라고 할 수 없었소. 이후 오랜 시간의 발전을 거쳐서 정식으로 관사가 되었을 뿐이오. > >옛날 (전한 시대의 학자) 가의(賈誼) 역시 복식제도에 대해 걱정한 적이 있었고, [[한문제|한나라의 문제]]는 친히 소박한 검은 옷을 입었지만 상하의 관리와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뜻대로 옷을 입게 할 수는 없었소. 여기서 당신이 말한 세 가지 일은 더욱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나타난 후에야 실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오. 그러니까 사마의의 대답은 '''[[삼국지 10/문제점#s-3|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하후현의 식견을 높이 사고는 있지만, 내용을 보면 '지금 시대에는 그런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과연 정말로 사마의에게 이런 정책을 실행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혹은 다른 모종의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하기 나름일 테지만(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사마의는 하후현 개혁의 타겟인 호족 성향이 농후한데다가, 그 세력을 기반으로 성장했기에 정치력을 발휘하기 위해 결국 자신의 가문을 비롯한 호족집단과의 긴밀한 연계가 필요했으므로 어느쪽으로 생각하던 호족 체제의 근본적인 개혁에 손대는 것을 받아들이기 꺼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나마 개혁을 시도했던 조상 정권의 불안정성을 이유로 [[고평릉 사변]]을 일으키며 등장한 사마의의 사마씨 정권 자체도 근본은 호족정권으로서 중앙군과 중앙권력을 장악한 뒤, 구품중정제의 주대중정 신설을 통한 호족 포섭을 통해 호족들을 회유하여 호족체제 내에서 조씨와 하후씨를 몰아내고 자기 가문이 권력을 잡는 수준에 그쳤다. 그리고 사마의 자신이 그런 정책을 실행할 사람이 없다고 실토했듯이 후한 말부터 쌓여온 이런 사회적 모순들은 사마씨를 중심으로 한 호족집단을 주체로 건국된 [[서진]]이 당장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호족을 직접 누를 수 없으니 차선책으로 황족에게 군사력과 행정권을 동시에 부여하는 준봉건제로 회귀해 호족을 억누르라고 했는데, [[팔왕의 난|결국 그 황족들이 폭주하는 것을 제어하지 못해 난리가 난 끝에]] 50여 년 만에 강남으로 쫒겨난다. 또 하후현의 개혁은 결국 '호족체제에 의한 통치'라는 근본적인 문제에는 칼을 대기 힘들다는 한계도 존재했다. 구품관인법에 대한 책임 의식을 촉구한 것과 지방 행정 조직에 칼을 들이댄 것은 곧 기득권층의 등용문과 지방 이권에 대한 도전과도 같았지만 일단 하후현의 관리 선발기준이라는게 결국 기존의 효행, 덕행 같은 추상적인 기준을 강화하자 수준에 불과했고 여기에 관장에게 관리선발 맡기자고 하는데 애당초 중앙정계에 맞는 관리만을 선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정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기준, 일을 관장에게 맡긴다고 이런 기준이 잘 지켜지리라 보기도 어려웠다. 또 관리를 뽑은 이후에 그들을 잘 걸러내자는 얘기는 근본적으로 호족 인재풀에서 선발되는 관리 임용제도를 온전히 개혁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구품관인법의 문제 자체는 하후현 이후로도 수백년간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거쳐서 조금씩 개선되어 나갔고 결국엔 선거제와 [[과거제]]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하후현이 시도했던 개혁은 분명 당시 위나라에서 시행되던 초기 구품관인법의 혼란스러운 운영방식을 지적하고 개선하려는 시도로서 선구자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한계는 분명 있었다 할 수 있겠다. 또 지방행정 체제를 간략화 하는 과정에서 특정 관직에 권력쏠림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문제 역시 하후현이 내세운 개혁안의 약점이 될 수 있었다. 물론 하후현의 군수철폐안은 기존의 군수와 자사가 사실상 권한과 범위가 겹쳐있으니 군수의 권한을 낮추어 중복행정을 피해야 한다에 가깝긴 하지만 이는 자칫 후한 말 [[한영제|영제]]가 목(牧) 제도를 부활시킨 것과 같은 영향을 줄 수 있었다. 한나라 대 자사 자체의 성립도 이런 태수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에 있었는데 영제 때 다시 설치된 목은 주의 관원들을 감독하는 감찰관일 뿐 아니라 주 전체를 다스리는 수장으로, 목이 되면 한 주의 군사력과 인력, 재력을 한손에 거머쥐게 되어 후한의 지방 자치화, 다르게 말하면 후한의 사분 오열을 가속화시켰었다. 군수를 폐하거나 그 권한을 줄이고 자사에게 권한을 몰아주게 되면 자칫 후한 말의 분열 마냥 정부권력의 지방 분산으로 인해 분열과 반란의 가능성을 부추길 수 있었다. 사마의는 후한 말 목에 권력이 집중됨으로서 생긴 문제를 직접 경험한 세대인 입장인 만큼 이 제도의 문제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면에서 보면 사마의가 완곡하게 이런 정책을 거절한것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셈이다. [[루쉰]]은 강연에서 이를 지적하여 대권을 쥔 사마의는 지방의 친위 군벌을 토벌하고 중앙에서 자신들의 권력 강화에 매진하였으니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보았다. 어쨌거나 그렇다면 하후현은 왜 굳이 같은 파벌의 수장인 [[조상(삼국지)|조상]]이나 [[하안]]이 아닌 다른 파벌의 수장인 사마의에게 이런 개혁안을 건의를 했을까? 어떻게 보면 이는 그만큼 같은 파벌일 망정 걍 [[친목질]] 잘하는 금수저 도련님에 불과한 조상과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이나 관료로서의 실무적 역량은 별로 검증되지 않은 하안의 정치력을 낮게 봤다는 의미겠지만, 그렇다고 정적이자 개혁에 의해 피해를 입게될 기득권층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사마의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다소 모순적인 일이다. 그러나 사마의의 정중한 거절 편지를 받아든 후 다시 답장한 하후현의 편지를 보면, 그는 사마의에게 제법 기대하는 바가 컸으며 그만큼 크게 실망했던 심정이 역력히 드러난다. '만일 당신이 조당에서 새로운 법령을 제정한다면 매우 빠른 속도로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개혁하기에 적절한 시기를 눈앞에 두고, 은근히 하려는 마음을 보류하고 그것을 명령 내리는 날이면, 아래에 있는 자들의 호응 또한 소리나는 곳을 찾아 울려오는 것 같을 것입니다.'라는 답장의 대목에서는 자신의 일파인 하안이나 조상이 아니라 오로지 사마의만이 자신이 생각한 위나라의 개혁을 진행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게 느껴져서 안타까울 정도다. 애시당초 사마의는 하후현 입장에선 [[하후휘|죽은 누이]]의 시아버지이기도 했다. 후세의 우리야 사마의와 하후현을 다른 파벌이라고 확실히 구분지을 수 있다지만 당대의 하후현 입장에선 옛 사돈 어른께 부탁하는 정도로 봤을 수 있다. 이는 그만큼 하후현이 사마의라는 거물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사마의 쯤 되는 인물이라면 '태생적으로 가진 자기 주변 카르텔에 때문에 전체적인 국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좌초시키는 전형적 정치인'이 아니라 '자신의 개혁이 국가의 대계에 무조건 도움이 되리라고 믿고, 사마의는 그런 자신의 개혁 정책을 진정으로 밀어줄만한 우국충정의 인물'이라고 믿었음을 의미한다. 어찌보면 이상은 높으나 현실은 시궁창인 어느 한 개혁가의 순수한 믿음이었다라고도 볼 수 있고, 자신이 진행하려는 개혁에 대한 지나친 확신 때문에 그로 인해 생길수 있는 문제점을 경시했으며, 스스로 개혁을 진행하고 실천에 옮기는 동력이 부족했던 하후현이라는 한 개혁가에 대한 한계로도 볼 수 있겠다. 또, 하후현은 자신과 함께 중호군을 지내는 등 동료로 인식하고 있던 [[사마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마의가 실권이 적은 태부로 물러난 것에 반해 그의 아들 사마사는 중호군의 자리에 올라 하안, 하후현 등과 함께 선거를 관장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세 사람이 쌓은 친분도 제법 깊었다. 일례로 하안은 당대의 성인 두 사람을 들어 하후현과 사마사를 지목했으며, 사마사도 의식적으로 두 사람과 교분을 맺어 일부러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후현의 누이동생 [[하후휘]]는 사마사의 아내였다. 비록 이 시점에서 하후휘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처남이고 매부 사이였다. 그 매부가 누이동생에게 [[독살|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다면 하후현도 이렇게 나오진 못했을 것이다. 하후현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장제(조위 태위)|장제]]가 호군으로 있을 때 아문(牙門)에서 자리를 얻고 싶으면 1천 필(匹)을 바쳐야 하며, 백인독이 되고 싶으면 5백 필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사마의는 장제와 가까워서 어느 날 그를 불러서 그 사실을 물어 보았다. 장제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하고, 농담으로 낙양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1전(錢)이라도 부족하면 안 되는 법이라고 했으며 사마의도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후현이 장제를 대신하여 호군이 되었지만 이러한 인사를 막지 못했다가 [[사마사]]가 호군이 된 후 이런 폐단을 없었다. 즉, 당시 위나라는 '필(匹)'과 '전(錢)' 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으며, 조예 대 [[사마지]] 등의 건의로 화폐를 재건하기 위해 [[오수전]]이 발행되었음에도 포백(布帛)의 화폐 기능을 제거할 수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어쨌거나 이는 시대의 폐단을 실제로 개혁하는데 있어 하후현이 그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한 예가 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