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후현 (문단 편집) === 조상 정권의 중축이 될 때까지 === 어려서부터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20살이 되자 산기황문시랑이 된다. 당시 유행하던 [[현학#s-1|현학]]에 있어서도 명성을 떨쳤다. [[하안]]은 사마사와 함께 하후현을 천하의 기재라며 칭송했다. 이걸 보면 하안은 사마사를 자신들과 같은 부류로 여겼던 듯 한데 결과적으로 그 사마사에게 [[고평릉 사변|뒤통수를 맞고 죽었으니]] 그 기분이 어땠을지는... [[조예]]를 알현할 때 황후의 동생인 모증과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하후현은 이를 어찌나 치욕스럽게 여겼는지 황제 앞에서도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명도황후]] 모씨는 조비 밑에서 불우하던 시기의 조예가 만나 다른 명문가 여인을 제쳐놓고 연애결혼까지 이룬 사이라 집안은 상당히 한미했는데 이걸 참지 못한 것. 이를 본 조예는 하후현을 우림감으로 좌천시킨다. 자부심이 조예의 심기를 거스른 탓에 하안과 마찬가지로 관운이 트이지 않았던 셈이다. 그러다 [[조방]]이 즉위하자 조상이 조방의 정치를 보좌했는데 [[하안]]과 마찬가지로 조상 정권에서 승진을 거듭해 산기상시 중호군에 이른다. 조상이 사마의와 대립하게 되면서 명망 있는 인물이자 개인적으로는 사촌이 되는 하후현을 끌어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는 중호군으로 있으며 많은 인재들을 발탁했는데 모두가 천하의 준걸로 지방관으로 나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출사 과정이 비슷했던 사마사가 일부러 공이 없는 인물들을 기용한 것과는 정반대의 정책인데 후술할 구품관인법 논쟁과 연관지어 호족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구품증정제에 반대하고 조조대의 유재시거를 이어가려 한 노력으로 보기도 한다. 진나라 시대의 곽반(郭頒)이 지은 《위진세어魏晉世語》(=세어世語)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하후현은 세상에 명성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중호군(中護軍)으로 있을 때 무관을 발탁하여 극(戟)을 들고 아문(牙門)을 지키도록 했는데, 이들 중 천하의 준걸이 아닌 자가 없었다. 또한 많은 관리들을 주군(州郡)으로 나아가게 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법도를 바로잡고 올바른 교육을 펼쳤기 때문에 작금에 이르러서도 그가 했던 방식을 따르고 있다. >---- >《세어》 그나마 자기편을 주로 등용한다고 비판할 여지가 없지 않았던 하안의 선거와는 달리 하후현의 선거에는 흠 잡을 구석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수(역사가)|진수]]는 [[정사 삼국지]]에서 그를 평하여 말할 제 "일찍이 그가 조상의 잘못을 바로잡았다거나 훌륭한 인재를 불러들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며 비판했지만, 이는 위의 곽반의 기록과 비교하여 보면 상반되는 평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