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후돈 (문단 편집) === 긍정적 평가 ===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하후돈이 군재가 뛰어났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조]]가 유독 하후돈을 특별히 더 귀하게 대접한 데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 조조의 입장에서는 친족 우대는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믿을만한 친족들이 곳곳에서 활약해줄 경우, 조조를 중심으로 하는 군벌 세력의 조직력이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세력 내에 조조의 막부와 [[헌제]]의 조정이 공존하면서도 서로를 견제하는 모순적인 정치 상황에서 조조가 권세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는 친인척 인사들이 군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어차피 조조 자신이 당대 최고의 군략가로서 중요한 원정에는 거의 항상 친정했고, 조씨 일족의 조인을 비롯해 일선에서 활약할 뛰어난 장군들도 많이 있었기에 하후돈의 군사적 능력 부족은 당장 큰 결격 사항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친족을 통한 군부 장악 원칙은 아들 [[조비]]에게 이어져서 조비 즉위 이후 대사마 조인을 중심으로 하였고 조인 사후에는 [[조휴]], [[조진#s-1]]이 대사마와 대장군이 되어 군부 중추에 자리잡는다.[* 무산계(武散階)의 최상층을 친인척에게 배당하는 것은 전한 시절부터 있었던 전통 같은 것이었다. 당장 [[하진(후한)|하진]]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촉에서도 [[장비]]와 (유비의 처남인) [[오의(삼국지)|오의]]가 거기장군을 지냈다. 조비 사후 조예는 사마의가 유능하다고 적극 푸시하고 그 일족까지 중용했는데, 사마의는 물론 알다시피 굉장히 유능했고 뛰어난 성과를 보였지만 조예 사후에 뒤늦게 받은 그 대가는 [[고평릉 사변|쿠데타]]였다.] 애초에 친족 우대라는 것이 한나라 시대에만 있던 독특한 전통도 아니고, 오히려 인류 역사 대부분의 시대에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일이라는 것 역시 생각해야 한다. '친족 우대'가 부당한 일로 여겨진 것은 시대적으로는 근현대 이후,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 등의 이념이 널리 받아들여진 일부 사회에서, 또 그 사회에서 '공적 영역'으로 여겨지는 일부 영역에 대하여 [[실적주의]]에 기반하여 능력 있는 인물을 기용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자리잡으면서 생긴 일이지 사회적, 시대적으로 보편적인 관점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실적주의를 당연시하는 현대인이라 해도 그 관점을 사회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장 현대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어떤 이'에게 '당신보다 더 유능한 다른 사람이 그 재산을 더 효율적으로 잘 활용할 것 같으니 당신이 물려받은 재산을 넘겨주어라'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것은 억지라고 여길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나 제후의 자리도 [[세습]]되던, 즉 '''권력과 신분 역시 재산과 마찬가지로 세습되는 사유물로 여겨지던 전근대 사회'''의 문제를 두고 친족 우대나 [[족벌주의]]가 반드시 그른 것이나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시대와 사회의 관점에서 친족 우대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정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모가 가진 것을 자식이 이어받는 것은 당연하고, 가문이 가진 것을 친족들이 나누는 것은 당연하지 않으냐?" 이다. 게다가 중국의 삼국시대가 가지는 특수성도 생각해야 할 것인데, 조조가 활동한 시기는 엄밀히 말하면 '''[[후한]] 말'''이고, 이 시기는 후한 조정이 실질적인 권력은 상실했을지언정 그 권위의 기억은 남아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당시까지 조조의 권위는 완전히 공고한 상태였다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만약 [[헌제|황제]]가 '''[[유비|새로 중앙정부에 진입하여 고위 장군직(및 명예 지방관직)을 수여받은 황족 출신의 전 군벌 두목]]'''과 '''[[동승|(전통적인 황제의 친위 세력이던) 외척 출신의 고위 장군]]'''을 끌어들인 궁정 [[친위 쿠데타]]로 권신 조조를 숙청하고 자신이 직접 권력을 장악하려고 (최소한 자신에게 좀 더 고분고분한 이로 권신을 교체하려고) 시도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명분상으로는 정말 눈꼽만큼의 하자도 없는 행동이고, 실질적으로는 아주 위험하고 무모한 행동이긴 했지만 최소한 성공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리라 여겨지는 행동이기도 했던 것. 결국 아직까지 유일무이한 황실의 권위를 얻지 못했던 조조로써는 다른 경쟁자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전근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이익 공동체이자 공동 운명체이던 가문(조씨ㆍ하후씨 일족)의 힘을 키워 자신의 세력을 다지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이 역시 현대인의 관점으로 비유하자면, '''한 [[회사]] 내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에서 더 유능하고 해당 업무에 적절한 다른 인물이 있는데도 개인적인 관계나 인맥을 이유로 다른 인물을 특정 업무에 배치한다면 이는 부당한 행위로 여겨지기 쉬울 것이며, 현대인이 말하는 친족 우대 및 족벌주의 비판은 주로 이런 개념에 가깝다. 하지만 여러 회사가 컨소시엄 형태로 함께 추진하는 프로젝트라면? 설령 다른 회사 소속 인물이 더 유능하고 적절하게 여겨지더라도 자기 회사의 몫인 업무를 다른 회사 사람에게 넘겨주기는 아주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이 속한 회사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친족 우대란 후자에 가까운 개념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조가, 더 나아가 조씨가 원했던 대장군감의 첫째 조건은 군사적인 재능이 아니라,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면서 아랫사람들을 적당히 아우를 수 있는 용인술과 인망을 겸비한 인물이었으며, 하후돈은 이 부분에서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조조 입장에서는 그래야만 헌제에 충성하는 자들이 군부에 파고들거나 군부의 장성이 헌제에게 직접 포섭되는 것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후돈의 몇 안 되는 군공의 대부분은 반란 진압이며, 특히 허창에 가까운 지역에서의 반란 진압을 주로 맡았다. 이를 보건데 하후돈의 역할은 군정을 총괄하는 대장군으로서 부하들의 인망과 충성을 얻으면서, 충성의 방향이 오직 조조에게만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지 않았나 생각되고, 반란 진압에도 최적화된 장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하후돈의 공은 조조의 패업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임협 집단의 의리를 기초로 구성된 초중반의 유비 진영과, 강남의 유력 가문으로 손견 -> 손책 -> 손권의 대를 이어 내려온 오나라 진영과 달리 조조 진영은 인척 집단, 초기 공신, 항장, 신진 세력이 뒤섞여 있으며, 이들이 제각기 내로라 하는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뽐내던 집단이었다. 이런 특색 있는 집단을 내적으로 단속하여 서로 공을 다투거나 알력 싸움으로 전력을 낭비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는 점에서 공신이라 부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할만한 부분이다. 실제로 군의 운용을 조금만 알아보면 전군을 통솔하는 지휘관은 교전능력보다는 이렇게 인사와 행정에서의 능력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대는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전투는 장병들이 수행하는 것이고, 그 위의 지휘관들은 조직의 운영과 작전 설계가 주요 임무인 것이다. 용장으로 알려진 하후연도 반란 토벌을 주로 맡았다. 게다가 하후돈이 큰 전쟁에서 자주 맡았던 직책 중 하나였던 후방 군량 보급은 매우 중요한 요직 중 하나이다. 행보관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고대 군대 운용의 핵심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군의 보급은 현대에도 중요한 일인데, 당장 군대만 갔다 와도 행보관이 좋냐 안 좋냐에 따라 부대 사기가 확확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이렇다 할 교통수단이 없는 고대 중국에서 군량 보급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조조군 같이 원정이 잦았던 군대에서 군량과 물자 보급을 전담한다는 것은 총사령관 다음으로 군 조직 내부에서 비중이 크다. 단적인 예로 원소군의 2인자였던 [[순우경]]이 [[관도대전]]에서 맡았던 임무는 군량고를 지키는 일이었다. 순우경은 연의에서의 찌질한 이미지와는 달리, 젊을 적에는 팔교위 중 하나로 원소와 조조와 어깨를 견주었던 명사급 인물이자 원소군에서 계속해서 주요 직책을 맡았던 상당한 인물이었다.[* 참고로 순우경이 패했던 이유는 원소의 원군이 늦었기 때문이지 순우경 본인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연의에서처럼 방심한 적은 없다.][* 사실 원소가 조조의 기습 사실에 대한 보고를 듣자마자 오소에 향했다면 충분히 순우경을 구원하고 보급고도 지킬 수 있었는데 명장병에 걸린 원소가 뻘짓을 하느라 원군을 늦게 보냈다.] 다른 사례를 보자면 한중공방전 당시 유비군의 군량 보급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제갈량이었으며, 그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북벌할 때 자신과 같은 탁고대신이었던 이엄에게 보급을 맡겼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조가 친정할 때 본진에서 군수물자를 지원한 사람은 바로 조조의 오른팔 [[순욱]]이었다. 관우도 양번 전쟁 시 군량 보급을 형주 주둔 군단의 2인자였던 미방에게 맡겼다. 과거까지 돌아보면 초한지에서 한나라 건국시절 [[고제(전한)|유방]]이 [[항우]]에게 '''1승 70패'''라는 99%의 전투에서 깨지고도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건 후방에서 [[소하]]가 끝없이 물량을 끌어모아 지원해줬기 때문이다. 긴 말 필요없이 소하가 한나라 공신 서열 1위에 임명된 것만 보아도 보급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소설 [[은하영웅전설]]에서도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히는 [[양 웬리]]가 그런 불패의 신화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전술 레벨에서의 [[에드윈 피셔]]의 함대기동과 [[알렉스 카젤느]]의 빈틈없는 행정 능력이 받쳐주었기 때문이라고 나온다.] 하후돈이 조조 진영에서 2인자에 가까웠단 걸 생각하면, 군사적 능력보다도 정치적, 행정적 능력으로 세력을 어떻게 운용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현대 군에서도 국방장관은 군사적 능력보다 군의 방향을 제시하는 정책을 수립하는 등 행정적 능력이 강조되며, 문민통제 전통이 강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국방장관을 맡는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군인 출신이 맡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현역 군인이 국방장관을 맡지는 않는다.] 맹장들과 책사들이 넘쳐나는 조조군에서 후방의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지 않게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인재들을 규합하고 행정적인 측면을 책임지며, 조조와 형제와 같이 친밀해서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인재라면 중용되는 게 이상한 게 아니다. 조조 초기 거병 당시 [[장막(삼국지)|장막]]의 반기로 인해 멸망 직전까지 갔던 점을 기억해보면 하후돈같이 믿고 중용할 수 있는 2인자의 존재감은 매우 크다. 거기다 하후돈이 군사적 능력이 떨어진다곤 한들, 출정할 때마다 연전연패하거나 치명적인 대패를 당한 것도 아니다. 다른 장군들이 워낙 출중한 무용을 떨쳤을 뿐이지 1인분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게다가 초중기의 조조군에서 하후돈의 훌륭한 인품은 야전사령관으로서도 매우 긍정적인 요인이다. 식자층에서는 헌제를 옹립하며 정통성을 확보했던 조조이지만, 일반 평민과 병졸에게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초기부터 상당히 가혹한 통치체제를 구축한 데다가 원정까지 잦았던 조조군의 사기가 높았을 리가 만무하다. 실제로 조조 자신이 단양병의 반란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특히 청주병 같이 투항한 이후 영구적으로 병역에 묶여버린 병사들을 더 가혹하게 다루다가는 프래깅 위험이 컸다. 하후돈같이 인품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사졸들이 휘하에 들고 싶다고 자청하는[* 실제로 하후돈을 다룬 정사에 저런 내용이 들어 있다. 이렇게 병사들을 잘 보살펴주기로 유명한 또다른 장수가 바로 [[관우]]. 관우는 무용과 병략에 능했지만, 군정에도 능해 병사들과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장군이었다.] 지휘관의 존재는 조조군의 성격상 반드시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하후돈은 지금으로 말하면 행보관 따위가 아니라 [[참모총장]] 또는 군수사령관 같은 역할이다. 이들은 직접 나가서 싸우지는 않으나, 후방에서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총감독하며 보급에 신경쓰고 전방에 나간 장군들이 잘 싸울 수 있게 해준다. 비록 한쪽 눈의 실명으로 전방에 나갈 수 없게 되어 이런 역할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조조군은 후방에서 전방 지원을 잘해줄 수 있게 되었다. 후방을 비우고 전방에 늘 [[제갈량]]이 있어야 했던 [[제갈량의 북벌|촉한]]이 어떻게 [[이엄|되었는지를]] 보라. 관우 역시 [[미방|후방을 맡긴 장수]]의 내통으로 형주를 상실하고 포위당함으로써 동오에게 사로잡히는 최후를 맞이했다. 더욱이 조조의 최측근 중의 최측근이라는 엄청난 권위까지 있어, 온갖 출신 배경을 가졌던 장수들도 그 앞에서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성격도 온화하여 조조가 점령한 영토 백성들을 진무하고 지지를 얻게 하는 데에도 능했다. 비록 전투의 공적은 적다 하여도, 그가 조조군 내부적으로 미친 영향력은 폄하받을 수 없다. 당장 하후돈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하후, 조씨 일가의 장군 중신들이 있는데 굳이 하후돈을 최고 직위에 임명했다는 점에서 단순 친족 우대가 아님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조인]]의 경우 친족에 대한 특혜를 제외하고서라도 조조군에서 [[오자양장]]과 함께 손에 꼽히는 [[명장]]이었다. 자신의 혈족인데다가 용맹과 병략을 함께 갖춘 조인을 냅두고 굳이 하후돈을 뽑은 이유는 위의 설명처럼 '''"군부를 통솔"'''하는 능력이 분명하였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