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종화 (문단 편집) == 선수 시절 == [[파일:attachment/하종화/Example.jpg]] 현역 시절. [[진주동명고등학교]]를 거쳐 1988년 [[한양대학교]]에 입학했으며 1987년 제5회 대통령배 대회[* 이 해에는 [[1988 서울 올림픽]] 준비로 1988년 대회를 2개월 앞당겨서 진행했다.] 남자부 신인상을 수상했다. 4학년으로 올라가기 전이었던 1990-1991 대통령배 대회에서는 소속팀인 [[한양대학교]]의 주포로 맹활약하며 [[한양대학교]]가 대학팀 최초로 대통령배 대회 정상을 차지하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대학교가 프로팀을 이겼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리고 본인은 이 8회 대회에서 MVP에 등극했다. 이런 활약으로 일찌감치 [[https://youtu.be/IPT77f-tGZk|국가대표에 발탁되었다]]. 아시아의 거포라는 별명을 가진 [[강만수(배구)|강만수]] 감독의 뒤를 이은 공격수로 평가받았으며, 1990년대 초반 당대 [[일본]] 최고의 배구스타인 [[나카가이치 유이치]](中垣内祐一)의 라이벌로 불렸다. 비주얼이 살짝 모자라보일지 몰라도 [[대한민국]] 배구에서 최고의 토털 패키지형 공격수에서 올타임 베스트에 들만한 천재 선수였다. 1992년 졸업을 앞두고 실업팀들의 스카웃 경쟁이 치열해진 가운데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현대자동차써비스]]는 91-92 슈퍼리그 [[한양대학교]] 멤버 중 졸업반이었던 88학번 하종화, 문양훈, 윤종일, 장재원 4명[* 여기에 현대는 89학번 라이트 [[강성형]]까지 스카웃한다. 나머지 한자리였던 장홍석만 럭키금성행.]을 데려가기 위해 헬기까지 동원해 스카우트전쟁을 벌였고 무려 7억이라는 거금을 쏟아부었다. 여기에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럭키금성]]이 돌연 영입경쟁중이던 윤종일과 장재원의 영입을 포기했고 고려증권과 영입경쟁을 벌였던 경기대학교의 207cm 장신 센터 제희경까지 빼오는 슈퍼리그 역사상 최고의 [[돈지랄]]을 선보여 대학 정상급 선수들을 영입했다. 이것이 배구 올드팬들에게 알려진 일명 88학번 싹쓸이.[* 이 88학번 싹쓸이 때문에 삼성화재의 창단과정에서 싹쓸이에 쉴드를 치는 일부 빠들도 있지만, 현대의 88학번 싹쓸이는 협회가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쇼미더머니]]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들이 모인 현대자동차써비스는 기존 베테랑들이 은퇴하고 한양대팀을 통째로 뜯어와 프로화한거나 마찬가지라 팀으로써 완성도가 부족했고 특히나 세터 장재원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한국 최고의 세터 [[신영철(배구)|신영철]]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상무 배구단|상무]], 선수 10명만으로 어렵게 꾸렸던 [[고려증권 배구단|고려증권]]에 밀려 결승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이 경험이 쌓이고 손발을 제대로 맞추기 시작한 1993-94 시즌 대통령배에서 팀을 정상으로 올리며 이 대회에서 2번째 우승의 감격을 맛보았다. 그러나 1994년 말 군 입대를 놓고 현대차써비스와 상무의 감정 대립이 발생하면서 선수 생활에 중대한 기로를 맞게 된다. 왜냐하면 1991-92 시즌 상무의 대통령배 우승 이후 실업팀들이 상무에 군입대를 시키는 것을 굉장히 꺼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남자 대표팀이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면서 하종화는 곧바로 군 입대를 통보받았다. 그리고 현대차써비스는 그를 상무로 보내지 않고 방위병으로 입대시켰다. 이 당시는 보충역 판정을 받아 방위병 입대 대상이 되었던 선수들도 상무에서 복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방위병이 폐지되고 보충역이 [[사회복무요원|공익근무요원]]으로 전환되면서 상무는 현역 대상자들만 받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렇게 되자 1974년생 이전 배구 선수들 중 보충역 대상자들은 공익요원 복무를 택하게 된다. 이들은 재검을 받지 않는 이상 기존 방위병의 복무 기간만 복무하면 되었다. 그렇게 해서 하종화는 일반 부대(72사단)에서 복무하게 되었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상무로 옮겼다. 그러나 선수 등록이 늦어지는 바람에 1994-95 시즌 슈퍼리그에는 뛰지 못했다. 복무를 마치고 팀에 복귀했을 때에는 이미 [[임도헌]]이 간판 스타로 자리잡고 있었고, 신인인 [[후인정]]이 새로 가세한 상태였다. 하종화는 더 이상 예전같은 기량은 보이지 못했고 1999-2000 시즌 슈퍼리그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 뒤에 은퇴했다. 하종화의 선수 시절 영상(1991년 월드리그)이 있다. [[https://youtu.be/IPT77f-tGZk|꼭 보자]]. 신영철 세터와 호흡이 잘 맞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