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이난성 (문단 편집) == 역사 == [[기원전]]에는 백월의 일파였던 [[여족]][* [[리족]]이라 불리는 소수민족으로 언어적으로 [[태국인]], [[라오스]]인, [[좡족]]과 가깝다.]의 땅이었다. 리족이 유일한 [[원주민]]은 아니고 섬 남부 일대에 상당수의 오스트로네시아계 종족들도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되기도 하지만 이들은 대다수가 [[한족]]이나 리족에게 동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부 오스트로네시아인들도 여전히 살고있기는 한데 이들은 [[베트남]] 중부에 주거하던 [[참족]]의 후예들이며[* [[참파]]를 건국한 세력으로 참파는 원래 힌두교를 믿었고 인도 문화권이었으나 참파 멸망 후 이슬람화되었다.] [[후이족]]으로 분류된다.[* [[21세기]]에 들어서 리족이 중국 남부로부터 들어온 민족이라는 얘기가 학계에서 슬슬 나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리족을 원주민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아메리카]]와 [[호주]], [[뉴질랜드]] 등의 [[아메리카 원주민]] 및 [[어보리진]]/[[마오리]] 역시 원주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들 구대륙에서 이주한 민족들이기 때문이다. 즉 리족이 중국 남부에서 유입된 민족이라 하더라도 하이난섬 원주민이라는 속성은 잃지 않는다.] 기원전 3세기 초에 [[남월]]에 의해 정복당하며 기원전 110년경까지는 [[남월]]의 영토[* 베트남과 하이난섬이 가깝고 관계도 있어서 일부 [[베트남인]]들이 은근히 회복할 고토로 여기는 땅이기도 하다.]였지만 남월이 [[한무제]]에 의해 멸망하면서 [[한나라]] 소속 군현이 되어서 [[중국사]]의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무제]] 정복 당시의 인력은 버티지 못하고 철수했고, [[삼국시대]]에는 [[손권/남방 개척|손권이 이곳으로 위온과 제갈직 등을 보내기도 했다.]] [[육손]]이 반대했지만 강행했는데 득보단 실이 컸다.[* 이 때 [[타이완섬]]과 [[일본 열도]] 그리고 [[류큐 제도]]도 정벌 대상에 들어갔다.] [[손오|오나라]]의 지배는 느슨했고 하이난이 실질적인 중국의 강역으로 흡수된 건 약간 더 뒤였다. 하이난은 오랜 시간 지금의 중국 북중부에 국한되었던 전통적 의미의 [[중원]]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변방 중의 변방, [[오랑캐]]의 땅, 유배지 취급을 받았다. [[삼국지]]에서는 '주애'로 불리는 섬이 여기이다. 현재는 [[베트남]] 영토가 되어버린 일남과 마찬가지로 유배지로 악명을 떨쳤었다. 이후로는 주애(珠崖)나 경애(瓊崖)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한나라]] 때부터 아주 악명 높은 유배지로서 [[소동파]]가 이 곳 단저우(儋州)로 유배오기도 하였다. 당시 하이난 유배는 곧 '''[[죽음]]'''을 뜻할 정도였다. 중원에서 터무니 없이 멀리 떨어져 있어 [[비행기]]가 없던 옛날에는 끝내 귀향을 못 하고 하이난에서 죽는 사람도 많았다. 소동파 역시 여기로 유배 후 사면받아 귀향길에 사망했다. 그래서 이 곳과 현재 [[베트남]] 중부인 일남군으로 유배를 갈 땐 무려 '''[[장례식]]'''을 치르고 가기까지 했다. 가면 못 돌아오기 때문에 사실상 죽은 사람 취급을 한 것이다. 다만 명청 시기 중국에 편입이 된데다가 50년간 일본의 지배까지 받으면서 중국으로서의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던 대만과 달리 하이난 섬은 한나라 때 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동안 중국의 일부였기 때문에 중국의 정체성이 강한 편이었다. [[파일:해서 중국.jpg|width=700]] 16세기 하이난 출신으로 대신에 오른 [[해서(명나라)|해서]]의 묘. 후일 [[해서파관]] 사태로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다. 이후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를 거치며 확실히 중국의 부속도서로 자리매김했다. [[남명]] 및 [[정성공]] 세력이 [[대만]]에서 버티며 항쟁할 때도 이 섬은 정씨 일가의 영향력을 받지 않고 조용했으며 청조 [[강희제]] 때 대만을 정복하며 여기까지 확실히 청의 영토로 굳혀버렸다. 거리가 너무 멀어 청의 [[팔기군]]은 극히 일부만 주둔했다. [[파일:하이난 중국 2.jpg|width=700]] [[하이커우]] 구도심의 개항기 건물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 제국]]이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자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벌이는데,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포기하는 대신 하이난을 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포기하고 배상금을 더 받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그 이유는 하이난이 일본과 너무 멀어서였다. 대만의 경우 류큐 열도와 붙어있는 곳이고 [[규슈]] 남단과도 가깝지만 하이난은 전혀 딴 동네였으며 당시 초기 단계의 비행기로는 왕래가 어려운 곳이었다. 뱃길로 1주일이나 걸리는 곳을 갖긴 쉽지 않았다. [[신해혁명]] 이후 광동군벌 등본은의 지배를 받았으나 [[1926년]]에 [[국민혁명군]] 4군 군장 [[리지선]]이 원정하여 [[중국 국민당]]의 세력권에 들어갔고 국민정부는 이 지역을 '''하이난 특별행정구'''라는 행정구역으로 통치했다.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물러난 이후에는 [[바이충시]] 휘하 18만명 대군이 넘어가, 중국본토에서 결판이 난 지 오래인 [[1950년]]까지도 중화민국이 통치했다. [[타이완섬]]도 그렇지만 당시 [[인민해방군]]의 빈약한 해공군 전력으로 바다 건너의 섬을 공략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이 그해 5월 1일에 민간어선 수백척을 동원하여 [[하이난섬]]에 상륙하여 공세를 벌이고 결국 [[중화민국군]]은 철수했다.[* 이곳을 접수하고 그 다음 최종 목표가 바로 [[타이완섬]] 점령이었는데 미국이 [[타이완 해협]]에 군함을 파견하고 [[6.25 전쟁]]이 터지면서 대만 진공을 무기한 보류했다.] 이때 중화민국의 '''하이난 특별행정구'''는 폐지되고 광둥성 산하의 '''하이난 행정구'''로 명칭이 변경된다. [[1980년]] 당시 같은 성에 있던 [[선전시]], [[주하이시]], 이웃 [[푸젠성]] [[샤먼시]]와 함께 경제특구가 되었으며 [[1988년]] 4월 '''하이난 행정구'''가 '''하이난성'''이라는 별개의 [[성(행정구역)|성]]으로 광둥성에서 분리되어 승격되었다. 문화든 뭐든 서로 완전히 다르고, 크기도 만만찮아서 웬만한 건 해당 지역에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은 하이난섬에서 밀려난 후에도 멀리 떨어진 [[타이핑다오]] 같은 [[난사 군도]]의 일부 섬들은 계속 영유했다. 이 잔존 남중국해 섬들은 [[중화민국]] 하이난 특별행정구 소속으로 계속 있다가[* 이 섬들은 해군 직할지구로 지정되어, 이곳을 관할하는 하이난 특별행정구의 하위 행정구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1979년]]에 하이난 본섬이 없는지라 관내 모든 섬을 [[가오슝]]시 치진구에 편입시켜 중화민국에서도 하이난 특별행정구는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난사 군도]], [[둥사 군도]] 등이 모두 과거 하이난 특별행정구 소속이었고 하이난 본섬을 영유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지금도 난사/시사 군도를 하이난 성에 넣었다.[* 단, 실효지배하지 못하는 둥사 군도는 하이난 특별행정구가 광둥성에 통합될 때 함께 광둥성으로 이관되었다가 하이난성이 신설된 후에도 광둥성에 남은 것으로 판단하여 광둥성 관할로 두고 있다.] 중국에서는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분쟁중인 [[남중국해]]의 여러 군도([[스프래틀리 군도]] 등)를 전부 하이난성 소속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만든 '하이난성 지도'를 보면 정작 하이난은 지도 위쪽 끝에 조그마하게 붙어있는 소축척지도다. 중국의 하이난 통계연감에 따르면 하이난성의 해역 포함 면적은 210만km²인데 남중국해 영해를 전부 면적 계산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난성은 중국에서 작은 성에 들어가지만 중국 지도의 해양 면적으로 [[크고 아름다운]] 크기를 자랑하는데 남중국해 암초들이 자기 거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 또한 남중국해 군도들이 하이난성에 속해 있다는 것을 종종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고는 한다. 2012년 7월에는 상주인구가 1,000명도 안 되는 이곳에 하이난 성 관할의 [[싼사시]](三沙市)를 설치해 [[남중국해]] 분쟁 당사국들의 강한 반발을 일으킨 바 있다. 그리고 2020년에는 산하 구까지 설치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3/0009823042|#]] [[2013년]] 이후 성도 [[하이커우시]]가 [[시진핑]]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일대일로]] 정책으로 인해 해상 실크로드가 개발되어 중요도가 오르고 있는 추세이다. 2018년 4월 13일에 [[시진핑]]은 하이난 성에 자유무역항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277&aid=0004218548|#]] 중국 정부에서 하이난을 [[홍콩]]과 필적하는 세계적 수준의 자유무역 지대로 키우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1&oid=005&aid=0001329576|#]] 그러나 [[특별행정구]]로 사실상 별개 특구인 홍콩과 달리 중국 본토 범주 내에 들어가는 하이난에는 사상적인 누수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경 원칙을 천명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1&oid=001&aid=0011663964|#]] 그러나 홍콩은 약 150년간 '''중국의 대외관문'''이라는 지위가 있고 영어 구사 능력이 홍콩에 비해 낮으며 형평성 및 규제 등의 문제로 중국 본토에서 홍콩 수준의 경제자유도를 보이기 어려워 난관이 많았다.[* 당장 페이스북 등 SNS사용에 있어 문제가 크다. 규격도 중국의 규격들은 국제 규격과 안 맞는 것들이 많다.] 결국 코로나 판데믹 이후 없던 일이 되었고 홍콩의 질서를 잡는 방향으로 선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