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바롭스크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예로페이 하바로프.jpg]] 지명의 유래가 된 러시아인 탐험가 예로페이 하바로프의 동상 [[만주]]로 일컬어지는 [[중국]] 동북지방에서도 가장 귀퉁이인, 즉 외만주의 [[우수리 강]]과 [[아무르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잡아 오래 전부터 [[연해주]], [[함경도]] 등과 함께 [[말갈]] 등 [[퉁구스]]계 민족을 위주로 [[동아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나 외곽지답게 문명세계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어 중국 사서에서의 정확한 교류기록도 [[명나라|명대]]부터 나온다. 그래서 이 일대에서 거주하던 말갈은 문명의 영향에서 벗어난 흑수말갈이었으며 이후 말갈족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진화해 [[여진족]]이 되는데 이 지역에서 살던 여진족은 문명의 영향을 받아 나라를 세우기도 했던 여진족들과 달리 진짜 야생에 가깝던 수렵채집, 어로 및 [[반유목]] 생활을 하던 [[야인여진]]이었다. 애초 야인(野人) 자체가 '''야만인'''을 뜻하는 멸칭으로 그만큼 못 쓰는 땅이라 문명의 혜택을 못 봤다는 걸 가리킨다. 이 일대에서는 주로 [[순록]]을 방목해 왔으며 그나마 문명의 영향을 받은 야인여진은 [[돼지]]를 방목하기도 했다. 1389년 [[몽골 제국]]-[[원나라]]가 몰락하자 몽골의 정복 이후 이 일대를 다스리던 옷치긴 왕가의 군주 아자스리는 [[명나라]]에 항복했는데 명나라는 이들을 타안위, 태녕위, 복여위의 3위로 편제하여 이들은 이후 우량카이 3위(올량합 삼위)라 총칭되었다. 그러나 3위 전체를 "우량카이"라고 칭한 것은 명나라 측의 오해로 실제로 몽골계인 [[우량카이족]]으로 구성된 것은 타안위 뿐이었고 나머지는 [[여진족]]이었다. 이 오해가 조선에도 퍼져서 이후 조선에서는 문명화된 건주, 해서여진을 제외한(적개심이 강해질 때는 그냥 다 싸잡아서) 나머지인 야인여진을 몽땅 [[오랑캐]]라 부르게 된다. 이후 건주여진이 주축이 된 [[청나라]]가 세워지고 해서여진 또한 여기에 흡수되어 [[만주족]]을 구성하게 되지만 야인여진은 만주족에서 제외된다. 그러다 [[강희제]] 치세 때에 [[팔기군]]의 원정으로 우량카이 3위는 완전히 청에 흡수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병자호란]] 직후 청은 조선에게 자신들 만주족에 적대적으로 일관하던 야인여진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한다. 그 전까진 야인여진은 [[류큐]]와 함께 조선에 조공을 해 왔다. 이 부분에서 혼동 때문에 아예 우량카이 3위도 조선에 조공했었다는 오류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명나라나 조선이나 야인여진을 싸잡아다 우량카이/오랑캐라 부르긴 했지만 애초에 이들은 단일집단도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잘 싸웠으며 그 중에서도 우량카위 3위는 위세도 좀 있었고 거리상 문제도 있고 해서 조선과 관계를 가진 건 이들이 아닌 두만강 유역의 일부 야인여진이었다.] [[17세기]] 육로를 통해 동진하던 [[러시아 제국]]의 [[카자크]] 탐험가들이 아무르 강가에 세운 캠프로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캠프는 당시 [[카자크]]의 지도자인 예로페이 하바로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이 이름이 쭉 내려오게 된다. 러시아와 청이 영토싸움을 많이 벌였던 곳으로, 1689년 [[청나라]]와 러시아의 [[네르친스크 조약]]에 따라 150여 년 동안 청나라에 복속되었으나, 1859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가 열강의 침략으로 정신없는 틈을 타 러시아는 [[아이훈 조약]]으로 이 지역을 되찾았다. 하바롭스크뿐만 아니라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까지 청과 공동관리하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이 조약 덕분에 건설된 것이다. 현재의 도시는 이때부터 유배 온 [[러시아인]] 죄수들을 이용해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다. 19세기 후반부터 러시아의 극동지역 개발이 시작되자, 하바롭스크에 학자, 군인 등이 들어오게 되며 본격적인 도시 발전이 이루어졌다. 물론 개발 인력은 대개 [[시베리아]]로 유배 온 죄수들이었다. 시베리아는 [[중앙아시아]] 일대와 함께 제정 러시아의 죄수 유배지로 애용된 곳 중 하나로 [[굴라크]]는 원래 이때 유배지에서 유래했다. 당장 [[이르쿠츠크]] 등 다른 시베리아 도시들의 경우도 이 굴라크의 산물이었다. 20세기 초반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건설되어 극동의 [[부동항]]으로 가는 통로가 되었다. 하바롭스크를 가 보면 아무르 강가를 따라 아름다운 옛 러시아 도시의 느낌이 물씬 나는데 그것들이 다 이 시기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동유럽]]풍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더 가까운 곳에 [[블라디보스토크]]도 있지만, 거긴 군항 이미지가 강하고 도시도 좀 더 현대적이라 하바롭스크의 풍경이 더 아름다운 편이다. [[적백내전]] 때는 한동안 [[일본군]]이 점령하기도 했다. 왜 일본이 점령했냐면 러시아 백군 반공세력들이 [[일본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답하여 시베리아 출병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이 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선 한인들을 일본군이 대량학살한 [[신한촌 학살]]이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적군 세력중 하나였던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이 반격하여 일본군은 전원 패퇴했고 백군 세력도 소멸되었다. 이 때 밀려난 백군들은 [[미국]], [[영국]], [[일본]] 등에 망명하여 망명 러시아인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는데 특히 [[뉴욕]]에 많이 정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이 [[일본 제국]] [[전범]]들을 상대로 연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이 열렸던 장소이며 이 때문에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만주국]]의 붕괴 이후 [[1950년]]까지 5년간 머무르기도 한 곳이다. 만주국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는 엄연히 전범이 맞았으며 일본으로 탈출한 후 미국에 항복하려 했으나 [[소련군]] 공수군이 푸순 비행장을 접수하는 바람에 실패, 그대로 포로로 잡혀 이 곳까지 끌려온 것이었다. 이후 그는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어 중국의 새 정부인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으로 조용히 살다 [[1967년]] 노환으로 자연사했다. 소련 시절만 하더라도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큰 도시였으나, [[소련 해체|소련의 해체]] 이후 인구가 줄어서 현재 [[극동 연방관구]]에서는 인구수 기준으로 2위를 차지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의 위치는 [[프리모리예 지방]] 남쪽 [[동해]]안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행정적,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는지 연방관구 행정청인 대통령 전권 대표부는 하바롭스크에 있었는데, 결국 [[2018년]] 12월 13일 대통령 서명으로 전권 대표부 소재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기게 되었다.[* 이는 [[세르게이 푸르갈]] [[하바롭스크 지방]] 지사의 반푸틴 정책을 피면서 하바롭스크에서 야당 [[러시아 자유민주당]]의 세를 강화시킨 것도 있다.] [[한국]] [[근현대사]], 특히 20세기 초반 독립운동에서 많이 언급되는 도시이다. [[고려공산당]]의 전신인 한인사회당이 하바롭스크를 기반으로 활동하였고, [[공산당]] 계열 [[독립운동]]의 많은 역사적 장면들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이며 [[독립운동가]]였던 [[김알렉산드라]]가 이 도시에서 활동하였으며, 마르크스가 24번지에 그녀의 영웅적 생애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북한]]은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으로 선전하지만 실제 태어난 곳은 하바롭스크이다. 정확히는 하바롭스크 인근 [[소련군|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88여단 붉은 깃발 부대에서 태어났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김일성이 소속된 88여단의 남야영이 위치한 우수리스크쪽이 더 신빙성을 얻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