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대성 (문단 편집) === [[대구 FC]] === 시즌을 앞두고 [[터키]] [[http://www.daegufc.co.kr/board_story_clubnews01/view.php?tn=board_story_clubnews01&list_count_s=6&G_state=Y&pm=4.2.1&part_part_s=&subject_s=&content_s=Y&name_s=&writedate_s=&search_word_s=%EA%B0%80%EB%B8%8C%EB%A6%AC%EC%97%98&sid=693&gid=&cpage=12&spage=11|전지훈련]]에 참가했다. 전지훈련에서 [[http://www.daegufc.co.kr/board_story_clubnews01/view.php?tn=board_story_clubnews01&list_count_s=6&G_state=Y&pm=4.2.1&part_part_s=&subject_s=&content_s=Y&name_s=&writedate_s=&search_word_s=%EA%B0%80%EB%B8%8C%EB%A6%AC%EC%97%98&sid=697&gid=&cpage=11&spage=11|한 골을 기록]]했다. [[베이징 궈안|베이징 현대]]와의 2006 통영컵 국제프로축구대회 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팀의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엔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도 [[http://www.daegufc.co.kr/board_story_clubnews01/view.php?tn=board_story_clubnews01&list_count_s=6&G_state=Y&pm=4.2.1&part_part_s=&subject_s=&content_s=Y&name_s=&writedate_s=&search_word_s=%EA%B0%80%EB%B8%8C%EB%A6%AC%EC%97%98&sid=707&gid=&cpage=11&spage=11|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2006년에는 18경기에 출전했지만, 15경기를 교체 출전하면서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다만, [[노상래]], 오주포의 은퇴와 [[홍순학]]의 이적으로 인한 빈자리를 메우던 [[오장은]]을 [[진경선]]과 함께 잘 뒷받침해서 다음 시즌을 기약하게 했다. 2007년이 되자 [[오장은]]마저 [[울산 현대]]로 이적하면서 대구의 중원은 비어버리게 되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함께해온 친구 [[이근호]]와 발을 맞춰 대구 특유의 공격축구를 이끌게 된다.[* 이 시절 [[이근호]], [[샤다라빠]]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샤다라빠가당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이근호를 인터뷰한적이 있었는데 이근호가 가장 잘맞고 절친한 선수로 하대성을 거론하자 샤다라빠가 '그럼 언젠가 같이 뛰고 싶으시겠어요?'라는 어이없는 멘트를 날렸다.] [[이니우 올리베이라 주니오르|에닝요]], [[루이지뉴]]도 가세하면서 [[대구 FC]]의 공격 축구가 잘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 이면에는 [[변병주]]가 하대성을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 변경을 시키면서 2선을 뒷받침하게 한 것도 한 몫했다. 진경선과 함께 중앙 미드필더로서 볼을 배급하고, 경기를 조율하는 모습을 보이며 엄청난 경험치를 쌓았던 것이다. 결국 25경기에 출전해 2골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하대성은 대구의 중원 사령관으로 우뚝 섰다. 2008시즌이 시작되고, 터키 전지훈련에서 하대성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52103|숨은 진주]]라 불리며 주전으로 뛰게 될 것임을 암시했으며, 시즌이 시작하면서 대구는 [[변병주]] 감독의 극단적인 공격전술과 함께 2008년 팀 득점 공동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이 당시 대구에 붙은 별명이 K리그의 로맨티스트. [* 다만 팀 실점도 1위에 그치는데 극단적인 공격전술의 맥락을 보여주는 점도 있었지만, 그 당시 공격진과 중원에서는 국가 대표로 선발되는 선수들이 있었지만, 수비진은 좋게 봐줘도 중간 정도로 평가받던 수비진의 영향이 크기도 했다. 덕분에 당시 주전 골키퍼이던 백민철은 엄청난 경험치를 쌓았으며, 만약 리그 상위권 팀으로 이적하면 국가대표로 뽑힐 것 같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루이지뉴]]는 울산으로 이적했지만, [[이근호]], 에닝요, ~~장남석~~의 삼각 편대와 함께 후방에서 경기를 조율하며, 볼을 배급하는 역할을 했으며, 결국 [[허정무]]에 의해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당시 대구에서 뛰면서 국가대표에 선발된 4번째 선수였다.[* 첫 번째는 [[홍순학]], 두 번째가 [[오장은]], 세 번째는 [[이근호]], 그 다음이 하대성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 꾸준히 국가대표에 모습을 보이는 선수는 하대성과 이근호 밖에 없다.] [[파일:200811672939.jpg]] 그 당시 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탈락했지만, 대구는 창단 이래 최초로 하나은행 FA컵 4강에 진출하는 저력을 선보였고 그 이면에는 부평고 동기 [[이근호]]와 하대성의 맹활약이 있었다. 시즌 기록은 31경기 5골 2도움으로 맹활약하며 K리그의 탑클래스 미드필더로 이름을 K리그 팬들에게 널리 알렸으며, 기량을 인정받은 하대성은 2009년 광란의 영입을 선보인 전북으로 [[이니우 올리베이라 주니오르|에닝요]], 진경선과 함께 이적했다. 이적 당시 [[http://sportalkorea.mt.co.kr/news/view.php?gisa_uniq=20090302191215§ion_code=10&key=%C0%FC%BA%CF%C7%E0%20%C8%AE%C1%A4&field=gisa_title&search_key=y|이적료 분쟁]]이 발생했다. [* 대구는 19억을 요구했으나, 전북은 이 계산에 문제가 있다며 14억을 제시했다. 두 팀은 합의 후 이적료 비공개를 결정하며 이적을 결정지었다.][* 이 당시 드래프트 시행 연도인 2005년 이전 입단자에게는 이적료 명분의 계약금이 발생했는데, 그들이 FA가 되어도 이적료가 존재했기에 발생한 문제였고, 하대성과 진경선 둘 다 FA 계약자지만 FA 이적료가 발생해서 잡음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원만한 해결 끝에 2009년 3월 2일,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