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재우 (문단 편집) === 우이 수복 === 그는 사주로 돌아온 후 무절랑에서 무공대부로 승진하여 좌급위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때 신임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 구종산이 곽예에게 유양(惟揚)을 철회하게 하고, 곧 고립된 사주(泗州)를 버렸다. 필재우도 명령에 따라 우이로 돌아가 금군이 양회 지역의 송군의 연락을 끊는 것을 막았다. 얼마 후, 다시 진강중군통제(鎭江中軍統制)로 전임된 뒤 봉황산의 전공으로 달주자사로 서임되었다. 개희 2년(1206년) 겨울 10월, 호사호[* 이후 위소왕을 죽이고 선종이 즉위하자 처형당한다.]는 보병, 기병 수만 명 및 전선(戰船) 500여 척을 이끌고 청하구에서 회하를 건너 초주(楚州, 지금의 강소 회안), 회음(淮陰) 사이에 정박하여 초주를 포위하였다. 강회선무사는 격문을 돌려 필재우에게 초주를 원조하게 하고, 단정(段政), 장귀(張貴) 등을 대신 보내 우이군을 지키게 했다. 결국 다시 만나 우이를 떠나자 금군은 곧 공격을 개시하였고, 단정 등은 당황하여 물러가 우이를 함락시켰다. 그 후 소식을 듣고 돌아와 우이를 수복하고 진강부도통제(鎭江副都統制)에 임명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