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핀/역사 (문단 편집) === 필리핀 제3공화국(1946~1972) === 1945년 10월 24일에 유엔에 가입한 후, 1946년 7월 4일에 독립하여 제3공화국이 수립됐으나 정관계 유착이 심해지면서 민중들이 공산당에 등을 돌렸다. 같은 시기 공산군도 좌익 무장투쟁을 개시하는가 하면 군부세력도 같이 대두해 정치상황은 혼란 일색이었다. 이는 세계적 흐름으로, 전 냉전기 좌우익 투쟁은 당시 많은 국가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된 문제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와는 별개로 필리핀만이 가지고 있던 여러 잠재적 악재 요인(산업 구조, 지주 세력, 분열 위험 등)도 많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UN 안전보장이사회]]가 개최되고 국운이 저물어가던 필리핀은 국가 사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UN의 정신적 가치에 부합하여 파병을 결정하게 된다. 파병국들은 [[미국]]을 위시한 개신교 뿌리를 가진 [[자유진영]] 국가들이 다수였는데, 구 스페인 식민지였던 가톨릭 국가들 중에는 유럽을 제외하고는 [[콜롬비아]], [[필리핀]]만이 이 전쟁에 참전한다. 기독교국가인 동시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키 위해 참전한 유일한 아시아 국가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이 시기는 당시 [[필리핀계 미국인]]들이 본인 재산을 가지고 정상적 방법으로 [[미국]]에 이민을 가던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필리핀계의 본격적인 대규모 미국이민 시기는 20세기 초반에 시작 되었으므로 1965년 아시아인 이민 금지가 개정된 것과 별개로 이전부터 이민을 가고 있었다. 이 시기 정도가 되면 필리핀을 한국과 비교해 당시 잘 살았었는지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로 국운이 내리막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필리핀 혁명(독립전쟁), [[미서전쟁]]과 [[미국-필리핀 전쟁]], [[태평양전쟁]] 등 반세기 동안 총 4번의 외교관계가 걸린 전쟁이 발생하였고 잇따른 전쟁속에서 정치와 외교 노선의 혼란, 그에 따른 내전상황이 얽히며 혼란이 발생하였다. 미서전쟁 전후로 라틴 아메리카와 스페인과의 무역로는 이미 오래전 없어졌고, 1,2차 대전을 거치며 혼란스런 세계 흐름속에서 영국 및 유럽과의 무역로 또한 끊어졌으며, 당시 중국 또한 청나라 말기의 혼란부터 [[국공내전]]을 거치며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되면서 필리핀의 중국과의 중계무역로로써의 기능 또한 상실된 상태였다. 즉, 몇백년간 이어지던 무역로들이 20세기 중반쯤 되면 전부 상실된 상태였다. 더욱이 전후복구 및 혼란한 정국을 바로 세워야 했던 시기에 대부분의 일루스트라도스(지식인층) 필리핀인들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미국,중남미,스페인으로 이민을 가거나 또는 스페인,미국을 상대로한 독립전쟁, 그리고 [[태평양 전쟁]]때 전쟁터에서 전사한 일루스트라도스들도 많았다. 도시권 중산층, 자본가, 지식인 및 전문직 계층이 붕괴되면서 지방 대지주를 제외하면 많이 남지 않게된다. 세계적으로 [[문맹률]]이 높던 시절 전통적으로 필리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중산계층의 붕괴는 타격이 컸고 전후복구 및 정국수습과 이후 필리핀 [[민주주의]]의 악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필리핀 정치의 공백을 지방 대지주들이 차지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면서 필리핀은 [[과두정]]형태로 이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대지주층들을 중심으로 [[반공]]을 확실히 하면서 확실히 [[친미]]국가가 되는 기반이 되긴 하지만, [[토지개혁]]과 멀어지면서 전근대 [[스페인 제국]] 시절부터 존재하던 대지주들의 권력이 유지되는 형태로 정치구조가 개편되고 민주주의와도 멀어지면서 20세기의 주요 키워드인 민주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활성화란 이미 떠나버리고 없는 기차와 같은 것이 되고 만다.[* 기존의 대지주층의 권력유지를 위해서 경제성장을 통한 새로운 자본가의 형성과 대중에 기반한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자유무역]]의 혜택, 시장개방으로 인한 해외자본유입, [[공산주의]], 그 어느것도 원하지 않게 된다.][* 현 필리핀의 정치구조는 현대, 근대, 근세, 중세 중에서 중세와 가장 가깝다.] 19세기초 부터 시작된 중국인들의 이민행렬 또한 이 시기(1930~50년대)가 끝물이다. 헨리 시, 루치오 탄, 존 고콩웨이 등 중국에서 가난했던 청년층들이 이 시기에 혼란일색이었던 필리핀에 와서 정착한 이후 극소수가 정경유착을 통해 재벌이 되기도 했다. 미국이 필리핀을 독립하고 떠난 이후 지방부동산과 농업, 관료 및 정치계는 토착 대지주들이, 서비스업, 관광업, 여러기업들은 이 시기에 이민왔던 신흥화교계 필리핀인들이 현재도 양분하고 있다. 한국의 기성세대가 보아왔던, 잘살았다고 생각했던 필리핀 이미지의 실상은 이미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 상태의 필리핀이었다. 사실상 한국또한 전근대 [[조선]]을 [[일본제국]]이 강제로 점령하면서 식민통치 36년간 착취를 겪었던 반면, 개화기부터 서구식 공업과 근대화가 시작되었던건 마찬가지였고 1960년쯤 되면 한국과 필리핀은 어떤 통계를 사용하던 별로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1970년대 부터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되면서 필리핀을 크게 추월하게된다. 탈 많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이 시기를 거쳐 완전히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은 GDP 규모 34위로 세계평균 이상은 유지하고 있는 등 준수한 편이다. 외교 또한 [[미국]]의 비 나토 동맹국이면서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으며 [[호주]]와도 군사협정을 맺고있다. 영어권인 [[영연방]] 국가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문화적으로 친밀하며 [[일본]] [[자민당]], [[이스라엘]][* 필리핀에 군사적인 부분에서 가장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과도 매우 우호적인 관계이다. 초대 [[필리핀 대통령]]은 로하스이나 재임 2년만에 사망했다. 그 다음 대통령인 키리노는 원래 필리핀의 정치인으로 항일운동을 지도한 사람이었으며, 대미협조를 근본정책으로 삼고 [[장제스]]와 유대하려 했다. 이후 1953년 역시 항일 게릴라 투쟁을 했던 [[라몬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는 공산주의 게릴라인 후크발라합을 진압하였으나, 195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그 다음엔 카를로스 P. 가르시아가 잠깐 집권했다가 1961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이 뒤를 이었다. 그 역시 반일 운동을 지원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반공을 표방하며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 했으나, 그도 1965년 선거에서 패배한다. 그리고 그 때 당선된 사람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이다. 이 시기쯤 되면 필리핀은 여러 악재요인으로 인해 거의 끝물인데다 회생불능 상태에 놓이게 되고, 늘 [[과두정]] 형태로 역사를 견인해오던 필리핀의 마지막 끝물을, 필리핀 역사에 단 한번도 없던 [[독재자]]가 화려한 부정부패로 장식한다. || [[파일:attachment/ferdinand-marcos.jpg|width=300]] ||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중국 계통([[화교]]) 필리핀인이다.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중국([[화교]]) 계통의 필리핀 유력가문 출신으로 전쟁 전에는 정적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도 받았었다. 그러다가 최종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며 석방되었고, [[항일]] 게릴라 활동을 거친 후[*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항목 참조.]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지냈고, 이후에 필리핀 자유당원 소속으로 하원의원을 지내고, 마닐라 시장직에도 당선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는 196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경선에서 패배한 후에 자유당을 탈당하고 국민당으로 당소속을 바꾸고 1965년 대선에서 51.9%의 득표율을 얻어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다. 재임 초기에는 친미반공 일변도였던 필리핀의 외교노선을 바꾸어서 [[소련]] 등 공산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고[* 물론 그러면서도 [[베트남]]에 [[필리핀군]]을 보내거나 필리핀 내의 공산반군을 때려잡는 행위는 계속했다.], 동시에 중소 경공업을 육성하면서 경제도 호황을 누리면서 사회문제들도 어느정도 해결되는 듯 보였다. 때문에 1969년 대선에서 61.5%의 득표율을 얻어 압승을 거두면서 전후 최초의 재선 대통령이 되었는데, '''재선 이후부터가 본격적으로 문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