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핀/역사 (문단 편집) ==== [[태평양]] [[갈레온]] 무역 ==== || [[파일:Sea lion.jpg|width=360]] || || 1596년 [[펠리페 2세]]가 하사한 필리핀의 문장. [[마닐라]]시의 깃발로도 사용되었다. 성은 스페인 왕실의 영토인 [[카스티야 왕국]]을, 검을 든 바다사자는 그를 수호하는 필리핀 제도를 의미했다. || 필리핀은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접경지이자 스페인 시각에서 아시아와 아메리카,유럽 사이를 잇는 교차로에 위치했다. 더욱이 인도차이나 반도와 동아시아로 부터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 중앙에 위치한 섬이라는 점은 충분히 아시아 유교적 [[중앙집권]]된 국가들로부터의 무역간섭이나 금지를 피하기 쉬웠고 해군만으로도 방어가 매우 용이했다. 더군다나 밀무역을 하기 쉬운 아시아 지역의 어촌이나 항구들이 도처에 널려있는 데다, 당시 [[포르투갈]] 령 무역기지 [[마카오]]와 매우 가까웠다. 마카오에서는 중국 내륙의 여러 상품들을 엄선할 수 있었고 내륙의 중국상인들과 접촉하기 쉬웠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스페인은 필리핀 제도를 동서양 무역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필리핀 도독령]] [[마닐라]]항에서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멕시코]])의 [[아카풀코]]항, 그리고 스페인의 본국의 [[세비야]]항 까지 이어지는 무역루트는 300년 넘게 이어진다. 1453년, 이슬람 군대에 의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스페인의 레반트 무역권 상실로 동방과의 무역이 차단된 이후 지구 한 바퀴를 돌아 100여 년에 걸쳐 이루어 낸 성과였다. 이것은 [[자본주의]] 발달사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 [[파일:Screenshot_20211121-225856_Google.jpg|width=400]] || ||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유입된 금화는 대부분 필리핀 도독령에 머물렀고 은화는 중국 및 아시아 무역에 사용되며 아시아에 유출되었다. || [[갤리온]] 혹은 갈레온 무역이라 불리는 이것은 특히나 중국과의 교역에서 막대한 수입을 올렸고 필리핀 제도는 [[스페인 제국]]의 재정에 한몫하는 대 아시아 무역기지로 쓰이게 되었다.[* 스페인은 애초에 [[인도]]와의 무역로를 열고자 지구 한 바퀴를 돌았지만 아메리카와 필리핀에 닿게 되면서 오히려 또다른 거대시장인 중국과의 무역로를 열게 된 것이었다.] [[푸젠성]], [[광둥성]]에서온 100t에서 300t급 중국 [[정크선]]들로 마닐라항이 득실거렸고 정기적인 공무역만해도 해마다 두 번이상 비단과 도자기들을 가득싣고 이곳을 찾았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선박]]들도 이전보다 더욱 자주 찿아오기 시작한다. 스페인의 신대륙 광산에서 유발된 유럽전역의 금,은 인플레이션 현상은 중국 및 아시아에서 [[도자기]]와 [[비단]], [[향신료]] 등으로 대량 거래하면서 해결되기 시작했다.[* 처음 250년만 계산해도 중국으로 유입된 은화만 최소 4000톤 이상이었다고 추정된다. 이는 스페인 제국 은 생산량의 3분의 1규모였다. 하지만 신대륙 모든 광산에서 채굴된 은의 양은 최소기준을 훨씬 웃도는 수치였을 것이라 추산되고 있다. 민간개발업자들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채굴된 광산의 생산량은 공식통계에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 또한 기존 상업왕국들의 무역루트를 그대로 이어받아 중국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인도]], [[일본]], [[자바]], [[수마트라]], [[캄보디아]], [[실론 섬]], [[벵골 만]] 등의 향료,계피,후추,상아,카펫,도자기,향신료,비단,차 등을 포함했고 필리핀인 장인들이 생산한 귀금속 공예품들 또한 유럽 및 [[아메리카]]에서 인기높은 사치품에 속했다. [[필리핀 도독령]]은 사실상 일부 [[수니파]]까지 포함하여 아시아 주요 문화권의 국가들과 그물망 같은 무역로를 형성하였다. 이후 350년간[* [[7년 전쟁]]이후 영국과의 무역관계 포함.] 필리핀은 아시아-태평양 시장과 대서양 시장을 사이를 매개한 동서양 무역의 중심고리였다. || [[파일:Trade Routes.jpg|width=450]] || 스페인의 필리핀 정복의 의의는 단순히 영토 확장이 아닌 스페인의 신대륙 자본을 구심점으로 토착 세력들이 스페인에 편입되고 하나되어 협력함으로써 제각기 보유한 무역로들이 하나로 합쳐졌고 군사력과 인재풀 또한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하였다. 이는 필리핀 제도 내부의 통합, [[스페인 제국]]과의 결합, 그리고 태평양 방면으로는 최초로 동양과 서양을 잇는 주요 무역로 된것에 의의가 존재한다. 제국법에 의하면 마닐라 갤리온선은 필리핀-멕시코 사이의 공무역만 허가되었으나 엄청난 수요와 수익성으로 인해 밀무역이 공공연히 이루어졌고 [[과테말라]],[[페루 부왕령]],[[파나마]],[[에콰도르]] 또한 갤리온 무역로의 주요 지류가 되어 상품교환과 인적교류는 필리핀과 멕시코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제국 영토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아메리카에서 필리핀으로 오는 상품들은 80%가 아메리카산이었고 20%는 [[북아프리카]], 유럽에서 수송된 것들이었다. [[와인]] 및 유럽산 [[화기]]들이 주된 상품이었다. 유럽산 무기들은 필리핀 해안국경에 배치되었다. 2010년부터 갤리온 무역은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 및 지명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으며 보다 활발한 역사 연구가 진행 중이다. 필리핀, 멕시코, 스페인을 포함한 국가들의 문헌 기록들을 연구 중이며 최소 32개국이 리셉션에 참가하였다. || [[파일:필리핀 골동품2.jpg|width=360]] || || 필리핀인 장인들이 생산한 귀금속 공예품들 || || [[파일:카톨릭 십자가_YouTube.jpg|width=360]] || 동시에 아시아 [[로마 가톨릭]] 선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예수회]]는 필리핀 각지의 식민지인들은 물론, 일본에서의 선교 또한 부분적으로 성공하여 일부 다이묘([[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외 다수.)들과 일본 피지배층들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이들은 열도 내에서 [[기리시탄]] 파벌을 형성한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선교 또한 할 수 있었고, [[천주실의]]와 같은 책은 이후 중국을 거쳐 조선에까지 전해진다. 스페인이 오기전부터 [[필리핀인]]들은 숙련된 상인,해적,어부,목수 등의 [[대항해시대]]에 있어 필수적인 인적자원이 많았고 스페인은 이들을 갈레온 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다. 오늘날 멕시코 인구의 30% 정도는 필리핀인 혈통을 조금씩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 유전인자들은 필리핀 및 인도네시아 지역과 일치한다고 한다. 이들은 아메리카로 이주한 필리핀인 이거나 필리핀 지배층들이 스페인에 판매하여 노예로 팔려간 이들이 인디언 및 스페인 혈통과 혼혈된 것, 이 비율은 스페인 왕실이 주도하는 공무역인 갈레온 무역 이외에도, 여러가지 비공식적 형태의 사무역, 밀무역으로 인해 멕시코지역과의 인구 전출입이 활발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고 당시 기록에도 남아있다. 16세기를 기점으로, 오늘날 멕시코 지역 이외에도 [[괌]], [[하와이]], [[루이지애나]], [[캘리포니아]], [[텍사스]][* 텍사스주는 한때 그 이름이 누에바 필리피나스(Nueva Filipinas)였다.]에도 정착촌을 형성했고 아메리카 개척에 참여한다. 오늘날의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샌디에고]] 등 태평양 방면의 거점 도시에 도달하였고 아메리카 대륙에 최초로 발딪고 정착한 아시아인들은 필리핀인들이다. 현재는 필리핀 혈통들은 히스패닉과의 혼혈로인해 모두 그쪽으로 동화되었다. 그러므로 [[중미]] 지역의 [[히스패닉]]들과 유전자를 일부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스페인령 아메리카 전역에서 모집된 정착민들과 군인들은 [[멕시코]]와 [[페루]]에서 훈련되고 그 중 엄선된 자들이 [[아카풀코]]에 집결하여 필리핀에 있는 요새로 파견되었다. 갈레온 무역에 참가한 선원들은 [[세비야]],[[멕시코]],[[마닐라]] 등 제국 전역에서 모집되었고 3분의 2는 해양경험이 많은 필리핀인들로 구성되었다. 해마다 태풍에서 살아남고 고온다습한 기후에서 자라는, 염분과 습기에 강하면서도 질기고 가벼운 나무들을 눈여겨보고 이곳의 나무들이 유럽보다 배를 만들기에 적합하다고 판단, 마닐라에 대규모 조선소를 건설하고 [[아웃소싱]]을 시작한다. 1700~2000t 급의 [[마닐라 갤리온]][* 1646년에 네덜란드 해군과의 전투때 단 3척의 마닐라 갤리온으로 19척의 네덜란드 함대에 맞서 승리한다. 이때 마닐라 갤리온은 단 한 척도 침몰되지 않았다. 사실, 두 번의 태풍으로 침몰한 [[무적함대]]를 포함해서 스페인 해군의 명성은 여러모로 재수 없는 해전들을 했던 16세기보다는,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100여 년간 가장 전력이 강했고 명성과 승률 또한 높았다.] 들이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이는 당시까지 건조된 것으로 알려진 유럽 선박 중 가장 거대한 크기였다. 배의 크기에 맞게 거대 캐논들을 다수 실을 수 있었다. 필리핀인 목수들에게 임금을 지불하였으며 지불된 화폐는 [[스페인 제국]]의 기축통화였다. 밀무역으로 인해 비밀리에 건조된 많은 갤리온선들이 태평양을 횡단하였고 필리핀 해안에 공백이 생기기 시작하자, [[80년 전쟁]]의 일환으로 네덜란드 함대가 필리핀을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총 5번의 해전이 있었으나 필리핀 선원들과 갤리온 및 토착군선으로 구성된 함대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선에서 압도하며 승리하였고 네덜란드는 큰 손실을 입고 필리핀 침공은 포기된다. 스페인은 이곳을 통해 일본과는 상업으로 단기간에 친밀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 필리핀 내 중계무역 담당자들인 이슬람 세력, 중국인(원조 화교)들과의 갈등이 심했던데다가 이후, 일본은 전국시대를 끝내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서 쇄국정책을 취하면서 무역에 위기가 찾아온다. 토착 화교와의 문화적 쇼크와 갈등은 심해서 몇 번의 전투까지 겪고 일방적으로 승리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중국과의 교역에 있어서 상술,통역 등으로 중요한 세력들이었고 훗날 필리핀에 정착한 화교들이 가톨릭을 믿게 되고 스페인계 및 토착 기득권층과 통혼을 하면서 완화된다[* 오늘날 필리핀 대부분의 정치가문들이 이들과 스페인 혈통의 혼혈들이다.].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정책을 실시한 이후엔 [[사쓰마 번]], [[센다이]] 번 등 지방 [[다이묘]]들과 밀무역을 하면서 어느 정도 해결된다.[* [[임진왜란]]때 사쓰마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이 제작한 사쓰마 도자기 또한 중국도자기와 다른 색채를 유럽에서 인정 받았다. 또한 중남미 원산인 [[고추]]와 [[고구마]]가 필리핀 도독령과 밀무역을 하던 사쓰마를 통해 조선으로 유입되었고, 김치가 빨간색, 매운맛으로 변하는 계기가 된다.] [[리마홍]], [[왜구]] 등의 침입사건 이후 내부첩자 방지를 위해서인지 이후 스페인은 안보상의 이유로 무역을 모두 필리핀 도독령 권한으로 귀속시킨다. 기존 지배층들의 지방항구들은 공식적으로 모두 닫아야만 했고 외국배가 입항할 때도 마닐라 등 정해진 항구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게했다. 이 정책으로 각 지방의 지배층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약화되긴 했지만 도독령 소속이 아닌 또다른 스페인 상단들의 사무역, 밀무역은 되려 널리 퍼졌다. 광대한 제국 영토 사이를 잇는 무역로들과 [[항구]]에 소속된 [[세관]]들의 화물양의 평가절하로 인해 [[지하경제]] 활성화는 가속화 되어갔다. [[펠리페 2세]]가 공식적으로 말년에 원주민 [[노예제]]를 폐지했다. 기존 토착지배층들의 [[사유재산]]인 노예들이 해방되면서 도독령 소속의 자유민이 되고 세금납부를 하게된다. 그러면서 기존토착지배층들이 임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게되자 권력이 약화되어 이에 대한 불만으로 지방에서 반란이 자주일어났다. 상술한 무역규제와 [[노예]]해방 모두 도독령 내 중앙집권화를 위한 장기적인 정책들이였다. 이 시기 스페인 도독이 중심이 되어 [[필리핀 도독령]]은 [[명나라]] 정복을 구상한 적이 여러번 있다. [[왜구]] 들과 여러 번 싸워 승리한 스페인군은 명나라 해안도시들이 소규모 왜구들에 의해 털리고 휘청대는 것을 보았고, 스페인 본국에 [[테르시오]] 1만명을 파병을 요청하고 식민지군과 왜구를 1만명 정도를 고용하여 명나라를 정복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펠리페 2세에 의해 묵살된다. 필리핀 도독령에서 스페인 제국 재정수입의 20%가 창출되었고 지하경제로 인한 경제 효과는 더욱 컸기 때문이다. 펠리페 2세는 명나라라는 거대시장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명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후 [[7년 전쟁]]의 결과 스페인은 필리핀에 대한 독점적 무역 체계를 상실한다. 1785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는 왕립 필리핀 회사를 설립하였다. 아시아 전역과 [[북미]]의 서부지역의 원자재, 대농장에서 생산된 상품작물들을 필리핀에 적재 및 집산하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거쳐 [[영국]]을 포함한 유럽전역으로 수출하는 것이었다. 필리핀 53대 총독인 바스코 총독이 필리핀 대지주들의 여론 또한 수렴하여 본국에 요청 하였고, 스페인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