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핀/역사 (문단 편집) === 정복과정: [[페르디난드 마젤란|마젤란]] 원정대 파견(1521) ~ [[마닐라]] 왕국 함락(1571) === 그렇게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들의 세가 확장되는 듯했다가, 16세기 중반 들어서 '''[[스페인]]이 나타났다.''' 1529년 [[스페인]]은 [[포르투갈]]과의 [[사라고사]] 조약에 의거하여 [[필리핀]]과 [[괌]],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를 차지하고, [[포르투갈]]은 서쪽의 [[마카오]]와 [[동티모르]]를 차지하는 걸로 정리되어 [[필리핀]]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동양 무역권을 확보하기 위해 포르투갈과의 조약을 성사시켰다. 상호 영유권만 인정했을 뿐, 아직 정복은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던 필리핀 제도의 국가들은 이들이 조약을 맺은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쉬웠던 사라고사 조약 성사와는 달리 생각보다 필리핀 중소국가들은 [[콩키스타도르]] 몇 백명으로 무너진 중남미 원주민 문명들만큼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1521년의 [[페르디난드 마젤란|마젤란]]의 첫번째 원정으로부터 1565년까지 스페인은 공식적으로만 6번의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앞선 5번의 원정은 모두 실패하였고 이러한 지속적인 원정대 파견 또한 [[신대륙]] 광산에서 나오는 막대한 [[황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명나라]] 또한 [[영락제]] 시절 필리핀 정복을 시도하여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도독부를 세우지만, 이것은 1세기 이내에 사라지면서 지방관 파견이 중지되고, [[화교]] 거류지로 다시 바뀐다. 자세한 기록들은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스페인은 먼저 아시아로 진출했던 [[포르투갈]]의 방식을 따라 상단으로 접근하여 지역 통치자와 우호관계를 형성한후 그의 정적을 제거하여 지역의 호응을 얻고자 하였다. 스페인 정예로 편성된 [[페르디난드 마젤란|마젤란]] 원정대[* 지구 한 바퀴를 세계 최초로 일주 한 것으로 알려진 그 원정대이다. 스페인 국왕이자 이탈리아 군주,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로스 1세]]의 지원을 받은 세계일주인 만큼, 최정예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스페인 원정대가 필리핀의 존재를 몰랐던건 아니다.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양 루트를 통해 [[말라카 해협]]을 지나 이곳을 지나간 적이 이전에도 많이 있었고 동남아,남중국해 탐험 및 여러지역과의 무역활동도 하고 있었다. 필리핀도 정복 이전에는 그러한 지역중 하나였다.]는 남부 [[민다나오]]의 부투안 왕국, 중부 비사야 제도의 와라이 부족들 그리고 [[세부]]왕국의 국왕인 라자 후마본과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부에 소속된 막탄섬의 촌장 [[라푸라푸]]는 무슬림이라 스페인에 적대적이었는데, 라푸라푸와의 몇 번의 전투 끝에 마젤란을 포함한 164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당한 후 나머지는 도주했고, 원정대가 스페인으로 귀환 했을 때 남은 배는 1척, 생존자 숫자는 18명이었다. 그 뒤에도 스페인은 계속해서 원정대를 보냈지만, 그 뒤 50여 년간 파견한 여러 원정대 또한 모두 실패 또는 패배로 돌아갔다. 그래서 한참을 지배하지 못하다가, 44년 만에 1565년 [[미겔 로페즈 데 레가스피]] 장군의 원정대에 다른 토착국가들의 지원군을 받아 막탄 섬 상륙과 전투에 승리했고 세부 섬에 영구정착지가 마련됨과 동시에, [[필리핀 도독령]]이 설립되었다. 막탄 섬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스페인군은 여러지역에서 토착왕가 및 부족장 등 기득권층 회유에 성공하게된다. 세부 왕국, 부투안 왕국은 이미 마젤란이 왔을 때부터 스페인에 우호관계였고 [[보홀]],파나이 등을 포함한 비사야 지방 대부분의 바랑가이들과 루손 섬의 톤도 왕국 등 다른 세력들도 대부분이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쓸모있는 협상이 빠르게 진행되어갔다. 고작 몇백명에 불과한 스페인군이었으나 이들의 수준높은 전투력과 신대륙 광산에서 나온 압도적인 부유함, 드넓은 영토를 직간접적으로 감지하자 그들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 이익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회유된 국가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었고 스페인군이 구심점이된 연합군은 나머지 지역의 정복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분열에서 통합으로 나아간다. 스페인이 여러 국가들에 충성을 권유하는 동시에, 필리핀의 절반 이상의 국가들이 스페인의 통치를 받기를 자발적으로 청했던 것은 스페인과 필리핀 역사학계 모두 인정하고 있다. 스페인은 회유와 정복활동을 병행하며 영토를 넓히다가 결국 1571년, 루손 섬의 마닐라왕국을 전투끝에 멸망시키면서 스페인이 필리핀 제도의 주도권을 거머쥔다. 한편, 민다나오 중서부에 위치한 라나오, 술루, 마긴다나오 등의 이슬람 왕국들은 회유를 거부하고 스페인을 경쟁자로 인식하여 이후 300여 년간 스페인과의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를 모로전쟁(Spanish-Moro conflict)이라 한다. 이는 필리핀 제도가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의 연장무대였던것을 의미한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통치한지 얼마안된 시점, 60여명의 스페인군은 [[카가얀 전투]]에서 필리핀에 해적질하러 온 1000여 명의 일본 왜구들을, [[화포]]와 유럽본토의 여러 전술들을 사용하며 거의 전멸시킨다. 국명은 당시 [[스페인 제국]] 최전성기를 열었던 국왕 [[펠리페 2세]]의 이름에서 유래되어 '펠리페 2세의 섬들' 이란 뜻의 Las islas Filipinas(라스 이슬라스 필리피나스)'라고 명명되었으며 이를 줄여서 식민통치기에 '필리피나스'라고 불렸고 현재는 영어식으로 필리핀(philippines)이라 불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