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핀/역사 (문단 편집) ==== 정치구조 ==== 16세기 스페인 도래 당시 필리핀의 정치체제는 상업적 질서가 가미된 [[봉건제]]에 [[노예제]]가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화폐경제가 매우 발달되었고 상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회였다. 스페인측 기록에 평민층(상인)들은 유아기에서 소년기때 부터 각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게 보편적 문화였고 [[바이바이인]] 문자를 무역활동의 기록에 활용하고 있었다. 금,은,귀금속 이외에 다른 금속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고 16세기 필리핀 전역 곳곳에 진출한 각기 다른 스페인 함대들의, 시대별로 기록된 서로 다른 자료들에 스페인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 마다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공통되게 기록되어 있다. 참조: Scott, William Henry. Barangay : Sixteenth-century Philippine culture and society.[* [[호주]] 대학들과 [[하버드]] 대학에서도 [[필리핀]]사 연구에 인용되고 있는 기록이며, 스페인측 문헌자료에도 교차검증되어 나타난다.] 또한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들 또한 필리핀에 자주 배를 타고 입항했던바, [[전국시대]]쯤 되면 이미 많은 일본인들이 필리핀에 금이 많다고 알고 있었다.[* 일본 게임 제작사 [[코에이]]에서 발매한 [[대항해시대4]]에도 필리핀의 대표적인 특산물이 [[금]]으로 표현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만난 스페인 측 사절단은 필리핀을 정복하겠다는 히데요시의 말을 전달해 들었고 [[필리핀 도독령]]에 보고하였다.[* 정작 3000명이 동원된 일본 정규해군은 1610년 안드레 페소아의 포르투갈 갤리온선 한 척을 상대하는 것도 꽤나 오랜 시간 애를 먹었다.] 이후, 1637년 [[도쿠가와]] 정권 또한 필리핀을 정복하려 했고, [[네덜란드]]에 설득을 시도 했지만, 네덜란드가 요새인 필리핀은 현실성이 없다며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 왕국 안에서도 지역마다 바랑가이(Balangay)라 불리는 기본단위의 정치체제가 무수하게 있었고 규모는 작게는 인구 몇백의 마을부터 크게는 몇천명의 소도시를 바랑가이라 불렀다. 바랑가이는 고대 필리핀 단어로 '배'라는 뜻이다. 한 바랑가이에 있다는 것은 한 배를 탔다는 뜻의 [[해적]],[[상인]]과 같은 해양 민족적 성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랑가이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별도로 건설한 항구도시를 공유하며 상업이 발달하고 국제무역으로 늘어난 외국 상인,선원,호위 무사 등 이민자들과 외국문화의 유입, 경제호황 등으로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몇 만명씩 인구가 늘면서 국가화 되어갔다. 한 국가안에서도 지방분권적 성격이 강하여서 왕을 중심으로한 중앙집권화된 [[수도]]가 있다기 보다는, 각 바랑가이들은 농업을 위한 지방이 있었고 흩어진 각 바랑가이들의 많은 인구 수가 무역을 위해 공유된 해안가 [[항구]]에 모여 살았다. 왕 또한 항구에서 한명의 전사이자 상인이었고 각 세력 사이의 중재자 또는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 확실한 것은 최근 필리핀 역사가 깊이 연구되기 이전에는 필리핀의 역사가 문명이 발달되지 못했던 정글 원주민 부족국가들의 이미지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명나라]]는 마닐라,부투안, 술루 등의 필리핀 지역의 통치자들을 천호장,만호장,족장,호족 등이 아니라 왕(王)으로 불렀다. 사무역을 제외한 공무역도 2년에 1번 있을 정도로 자주하였다. 기본적으로는 다투(Datu)라 불리는 왕이 통치하던 [[군주제]] 사회였으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아서 왕권은 중간 또는 낮았으며, 노예계층을 제외한 왕과 귀족, 일반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었고, 각 제각기 [[사유재산]]과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한 [[징병제]]는 발달되지 않았으나 고용과 직업군인 문화를 바탕으로 [[용병]]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징병이 아닌 [[고용]]이 보편개념이었다. 식민지 이전의 필리핀 해적 용병들은 동남아 전역과 중국남부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실무중심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측의 기록에 루손인들은 관료,지주,통역사,항해사,선주,해군 사령관 등 [[루손 섬]]의 인재들이 그대로 동남아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포르투갈도 직접 고용했다. 명분 보다는 각자의 이익이 일치할때 함께 움직이는 [[귀족공화제]]적 또는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다. 경우에 따라 한 왕국 안에 왕이라 칭해지는 사람이 두 명이거나 네 명인 채로 몇 백년간 공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술루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 한 국가 안에서 상인들이 각자 보유한 무역로에 따라 가진 영향력이 중첩되어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어 왕국 전체를 돕는 형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명분과 종교, 파벌로 인한 신학적 갈등이 존재하면서도 이익 앞에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닐라는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던 곳이었다. 마닐라 왕국 또한 마닐라 항구를 중심으로, 톤도,카인타,나마얀 등의 도시들과 외곽의 많은 바랑가이 귀족들의 연합체였다. 왕은 돈이 매우 많고 영토에 상업적 이익을 가장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져다 주는 상인이어야만 했다. 일단 그러한 사람이면 외부에서 왔을지언정 토착세력에 의해 상징적인 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다. 외부에서 온 자가 왕으로 옹립될 요소는 매우 다양한데 다른 동남아 국가와의 혼맥이 되었던 이슬람계의 고귀한 혈통이던, 스페인처럼 금광과 이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던, [[말라카]]와 같은 무역중심지에서의 이름높던 상인이던 왕이 될 여러 요소들은 반드시 외교관계, 그리고 국제무역으로 연결되어 이익을 창출했다. 이외의 왕의 자질인 지역내에서 1.돈이 많고, 2.군사력이 강하며 3.보유한 노예가 많고 4.정치능력이 뛰어나고 5.내정능력이 뛰어나고... 6.보유한 영지가 많다 7.기타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지역내의 쟁쟁한 토착 귀족들도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자들이 왕으로 추대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했다. 대표적인 첫번째 예로 [[술루 술탄국]]의 초대 왕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방계 후손이었다. 동남아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보유한 상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필리핀 제도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술루지역에 당도했는데 기존의 이슬람계 토착왕국과 귀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규모 군대가 아닌 작은 상단을 이끌고온 무함마드의 방계후손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귀한 혈통이라는 이름값으로, 기존세력들은 이슬람 네트워크에 깊이 접근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컬버린]],[[화승총]] 같은 것도 아라비아로부터 일찍부터 도입했다. [[청나라]]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것은 술루 술탄국엔 몇백년간 왕이 2명이었다. 하나는 기존 토착세력들의 기존의 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함마드 후손인 명목상의 왕이었다. 두번째 예로는 [[필리핀 도독령]], 바로 스페인이었다. 필리핀인들과 문화도, 인종도, 종교도 완전히 다른 스페인인들이었고 총 5번의 스페인의 공식적 정복시도들이 실패하였으나 결국 기존 절반 이상의 토착 왕국들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였다. 결국 스페인 기록에 이들이 스페인 국왕의 지구반대편에 있는 신하로써 표현된 것은 스페인인들이 당대 유럽 최고의 국력과 더불어 신대륙 영토와 그 광산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고 동서양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페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있어 몇백명의 매우 적은 병사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왔기 때문에 [[라푸라푸]]의 사례와 이후 4번의 원정 실패에서 보듯 몇 백명의 스페인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토착왕국들은 스페인의 신하가 되길 원하여 그들로부터 높은 자치권을 받는 동시에 스페인에 중국 및 아시아와의 기존 무역로를 제공하고 스페인의 아시아 항해, 태평양 횡단, 아메리카 개척, 갤리온선 건조, 아시아 정복[* [[브루나이]], [[대만]], [[인도네시아]] 일부까지 정복하고 [[필리핀 도독령]]으로 편입했으나 이후 영토를 상실한다.]에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며 협력하였다. 또한 그 자치도는 매우 높아서 심지어 초기 100년간은 마닐라에 살던 무슬림들도 이슬람교 복식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여러 임금 이외에 [[필리핀 도독령]]은 주기적으로 250,000페소의 태평양을 건너온 금을 제공 받았다. 물론 이러한 상호 협력관계는 식민지 후반이 되면서 뒤집혀져 그때부터는 필리핀이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었다. 그 많던 세력중에 19세기까지 살아남은 세력들은 [[필리핀 도독령]],[[술루 술탄국]] 둘 뿐이다. 기존 왕국들의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다른 수많은 세력들의 연대기가 남아있지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