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타고라스 (문단 편집) == 생애 == 피타고라스는 보석 세공사 므네사르코스의 아들이며, [[사모스 섬]] 출신이다. 아버지 므네사르코스는 사모스에 기근이 심했을 때 장사하러 왔다가 정착해 시민이 되었고 여기서 아들 피타고라스를 얻었던 것이다. 나중에 피타고라스는 튀레로 보내져서 점성술에 능했던 칼다이오스[* 칼다이오스(Chaldaios): 고대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사제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점성술에 능했기 때문에 점성술사의 대명사로도 쓰인다.]들에게 맡겨졌다고 한다. 거기서 그들의 이론을 받아들인 다음, 이오니아로 돌아가서 레스보스 섬의 페레퀴데스 밑에서 공부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피타고라스는 사모스 섬으로 돌아와 헤르모다마스의 제자가 되었으나 헤르모다마스는 이미 고령이었고, 젊은 피타고라스는 배우고 싶은 열망에 고국을 등지고 여행을 떠나 그리스뿐만 아니라 이민족의 비밀스런 가르침에도 입문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가 이집트에 머물러 있었을 때 시모스의 유력자 폴리크라테스가 편지를 통해 그를 이집트의 왕 아마시스에게 추천했다. 이곳에서 피타고라스는 이집트 말을 통달했다. 그 다음에 그는 크레타 섬으로 가서 종교인 에피메니데스와 함께 [[제우스]]가 태어나 자란 곳인 '이다의 동굴'을 탐험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는 내밀한 성소에까지 들어가기도 했다. 이를 통해 신들에 관한 은밀한 비전들을 배웠다. 이후 그가 40살이 되었을 때 다시 사모스 섬으로 돌아왔으나 조국이 폴리크라테스에 의해 참주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의 압제를 참고 견디는 것은 자유인으로서는 잘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는 이탈리아의 크로톤으로 떠났다.[* 이 지역을 연고로 하는 2016/17시즌 세리에A에 승격한 축구팀 [[FC 크로토네]]의 애칭 중 하나가 Pitagorici인데 이와 관련있다.] 그곳에서 이탈리아의 그리스 정착민들을 위해 법률을 제정하고 피타고라스 학파를 세워 제자들과 함께 성공적으로 공동체를 이루었다. 거의 300명에 달하는 그의 제자들은 나랏일을 최선으로 관리했기 때문에, 그 정치체제는 사실상 '최선자지배정'[* 부유한 자들이나 명망가들이나 왕이나 귀족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 지도자가 되는 정치체제. 세습되지 않는다.]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의 명성은 널리 퍼져서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그의 말을 들으려고 찾아왔다. 피타고라스의 밤 강의에는 무려 6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를 만나 보러 모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있는 자격이라도 허락받으면, 그들은 무언가 큰 영예라도 만난 듯이 친지에게 편지를 썼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의 집을 '[[데메테르]]의 신전'이라 부르고, 그가 다니던 좁은 길을 '[[무사이(그리스 신화)|뮤즈]]의 성소'라 부르기도 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이탈리아 땅에 수많은 인물들을 키워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채식]]을 시켰다. 그는 [[윤회|윤회설]]을 주장했는데, 사람의 영혼이 동물에게도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기에 동물을 희생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채식을 시켰던 것이었다. 다만 그는 [[콩]]을 삼가라고 명했는데, 콩은 영혼의 윤회에 방해될 뿐더러 소화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금하고, 술에 취하거나 포식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성행위는 건강에 좋지 않으니 절제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는 "친구의 것은 공동의 것이고, 우정이란 동등함이다"라고 말하며, 그와 함께 하려는 사람들의 재산들을 공동의 것으로 만들어 관리한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했다. 제자들은 5년간 침묵을 지키고 스승의 강의를 듣기만 할 뿐, 승인받기까지는 결코 피타고라스를 보는 일이 없었다. 90세의 피타고라스는 제자들과 함께 밀론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있었는데, 입문의 자격이 없다고 판정받은 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질투심으로 말미암아 그 집에 불을 지르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크로톤의 시민들이 피타고라스가 참주를 수립할까봐 그걸 경계해 불을 질렀다고 한다. 가까스로 불타는 집에서 탈출한 피타고라스가 마주한 것은 넓은 콩밭이었다. 피타고라스는 그 콩밭을 가로질러 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콩을 밟기보다는 차라리 이곳에서 붙잡히자. 말로만 떠드느니 죽임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고 한다.[* 콩을 먹지 말자고 했지, 콩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하지 않았는데 이런 일화가 있는 거 보면, 콩을 먹지 않는 것에 대한 비꼼의 일화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도 동시대에 콩을 먹지 않는 피타고라스에 대해 수많은 비꼼이 있었다. 그 중 한 시는 이렇다. "아아! 피타고라스는 왜 그토록 콩을 두려워 했는가? 왜 그는 자기 제자들과 뒤섞여 죽었는가? 거기에 콩밭이 있었다. 그는 콩을 짓밟지 않으려고, 아크라가스 사람들에게 붙잡혀 삼거리에서 죽었다." (시는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2》 2021. 나남출판. p.185 에 나온다.)] 이렇게 해서 그는 추격자에게 잡혀 목이 베였다. 그리하여 그의 동지들 대부분도 살해당했는데 대략 40명에 달했다. 하지만 극소수는 도망갔고 그들이 피타고라스의 최후에 대해 증언하며 알려지게 되었다. 혹자는 피타고라스가 거기에서 도망쳐 나왔고, 이후 메타폰티온에 있었던 뮤즈의 여신들 신전으로 숨어들어 40일간 곡기를 끊은 뒤에 죽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반면 헤라클레이데스[* 비슷한 이름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동명의 철학자 헤라클레이데스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동명의 사람들 중에서 기원전 2세기경에 활동한 역사가 헤라클레이데스를 말하는 것이다.]는 피타고라스가 사모스 섬에서 이탈리아로 왔을 때, 피타고라스를 반대하던 크로톤의 귀족 퀼론[* 퀼론은 한 때 피타고라스 밑에서 공부하고자 했으나 그가 참주적 본성을 드러내자 피타고라스가 그를 거부했고 이 때문에 적의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었다.]이 성대한 잔치를 벌이는 것을 보고는, 여기마저도 참주가 지배할 것이라는 사실에 절망하여[* 애초에 피타고라스가 이탈리아에 온 이유가, 자신의 고향 사모스 섬이 참주 폴리크라테스의 지배를 받는 것을 보기 싫어서 였으니...] 메타폰티온으로 물러가 더 이상 살기를 바라지 않고 곡기를 끊어 삶을 마쳤다고 전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