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천득 (문단 편집) == 생애 == [[1910년]] [[5월 29일]], [[한성부]] [[종로]](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아버지 피원근(皮元根)과 어머니 김수성(金守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홍천군|홍천]]이며, 호는 금아(琴兒)이다. 부친은 구한말 군부주사(軍部主事)를 지낸 관료 출신으로[[http://sjw.history.go.kr/id/SJW-K40020260-00200|#]] 서울 종각에서 종로5가 땅까지, 강남에서는 [[양재동]] 땅에 이르기까지 소유한 유명한 부호였다. 가죽신을 팔아 큰 돈을 벌었으며, 앞서 말한 군부 주사는 돈을 내고 산 벼슬이라고. 그래서 관직이라기보다는 칭호에 가까웠다고 한다.[* 「피가지변」참조] 6살 무렵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는 [[일본인]] 대신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피천득이 10살이던 1920년에는 모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삼촌 집에서 자랐다. 그의 호인 '금아'(琴兒)는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서화(書畵)와 음악에 능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가 붙여준 호이다. [[경기고등학교|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도중 [[1926년]]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 [[1929년]]부터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 호강대학)[* 중국 공산화 후 폐교되어 없어졌다. 동문으로 [[김웅권]], [[주요섭]], [[주요한]], [[현진건]](중퇴) 등이 있다.]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1937년]] 졸업 때까지 국내를 여러 번 오가며 많은 문인,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을 발표하며 등단하게 된다. [[1937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미국]]계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社[* [[록펠러]] 가문의 회사로 유명하다.]의 직원으로 근무하였다가 [[서울]]에서 교원생활을 하며 영문학 연구와 시 창작에 매진하던 중 [[1945년]] [[경성대학]] 예과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이후 [[1946년]] 이름이 바뀐 [[서울대학교]]에서 [[1974년]]까지 [[영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4년]]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약 1년간 영문학 연구를 하기도 했다. [[강원도]] [[춘천시]]의 [[성심여자대학교]]에 출강하기도 했다. 교수직을 그만둔 뒤에는 장기간의 [[미국]] 여행을 다녀왔으며, 그 후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본동에 있는 집에서 살다 [[2007년]] [[5월 25일]] 향년 96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생전에 술과 담배를 멀리했기 때문에 97세까지 장수한 듯하다.[* 체질상 안 맞았다고 한다.] 말년에 수필 창작 활동이 없었던 것은 이전의 작품들을 뛰어넘는 글을 쓸 여력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다. 장례는 천주교 신자인 고인의 뜻에 맞게 [[죽은 이를 위한 미사#장례 미사|장례 미사]]로 치렀다. 우연히도 이 장례 미사를 행한 2007년 5월 29일(양력)은 피천득의 생일이었다. 장지는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이다. 사후 [[2008년]] [[6월 5일]], [[서울시]] [[송파구]]에 위치한 [[롯데월드]] 민속박물관 입구에 '피천득기념관'이 개관되어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옷가지와 소지품, 귀중품 등이 실물 그대로 전시되어 있으며 생활했던 방의 인테리어 그대로 옮겨져 그의 삶과 생활을 한눈에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