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로이센 (문단 편집) === [[독일 기사단국]]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튜튼 기사단 깃발.svg|width=100%]]}}} || || 튜튼 기사단의 깃발 겸 독일 기사단국의 국기 || 프로이센 원주민인 프로이센인(Prussians)(프로이센족)은[* 프로이센인이라는 이름이 훗날 이 지역에 사는 [[독일인]]들을 뜻하는 이름으로 굳어지면서 원주민들은 구 프로이센인(Pruzzen)으로 구별해서 부르게 된다. 한국에서는 프루스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언어적으로 특수한 [[발트어족]]의 한 갈래이며[* 혈통적으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와 가까웠다.] [[13세기]]에도 [[기독교]]가 아닌 그들 고유의 신앙 [[로무바]]를 믿고 있었다. [[13세기]] 초, [[교황]]이 [[북방 십자군]]을 선포한 이래 [[폴란드 왕국]]의 [[가톨릭]] 세력이 이곳으로 진출하고자 시도하였으나 대부분 실패하였고, 역으로 폴란드 변경 지역이 프로이센인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다. 이 변경 지역의 영주 '마조프셰 공작 콘라드'는 [[1226년]] [[튜튼 기사단]]에 도움을 요청했다. 튜튼 기사단은 마조프셰 공작이 마련한 약간의 땅을 전초 기지 삼아 프로이센 십자군을 시작하였다. 해를 거듭하며 이어진 십자군의 침략으로 프로이센인은 차례로 복속되었고 튜튼 기사단은 프로이센 전역에 여러 도시와 성채를 건설했다. 튜튼 기사단이 정복한 땅은 [[십자군 원정]] 개시 이전에 기사단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맺은 '리미니의 금인칙서([[1230년]])' 등의 [[조약]]을 명분으로 튜튼 기사단의 영지가 되었고, 도움을 청했던 마조프셰 공작과는 반강제로 조약을 체결, 십자군 전쟁을 통해 정복한 영토를 기사단령으로 삼아 [[독일 기사단국]]을 건국하였다. 독일 기사단국은 원주민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면서, 독일 본토에서 독일인 이주민을 유치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중세]] 시대의 평민들은 많은 제약과 차별을 받으며 살았는데, 독일 본토를 떠나 동쪽의 새로운 정착지로 향하면 여러 혜택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많은 수의 [[농노]], 도시민 등의 독일인들이 동쪽으로 이주하였다. 이를 [[동방식민운동]]이라 부른다. 동쪽의 새로운 정착지를 다스리는 지배자들은 이주민을 유치하기 위해 여러 혜택과 지원을 제공할 것을 열심히 광고하였다.] 그 결과 프로이센은 독일화가 진행되었다. [[14세기]]에 [[전성기]]에 접어든 독일 기사단국은 그 영토가 남쪽으로는 폴란드 북부([[단치히]]가 위치한 포메렐리아와 프로이센), 북쪽으로는 [[고틀란드]] 섬과 [[에스토니아]], 동쪽으로는 [[페이푸스 호]]에 이르렀고, 이렇게 광활한 영토를 보유한 기사단국은 동쪽의 숙적인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벌였다. 그러나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 연합군과의 대결은 [[1410년]]에 [[그룬발트 전투]](1차 [[탄넨베르크 전투]])라는 대참사를 불러왔고 이후 기사단국은 서서히 쇠퇴하다 [[1453년]] ~ [[1466년]]의 '13년 전쟁'으로 완전히 몰락, 수도 [[마리엔부르크]]와 무역의 황금 알 단치히를 빼앗기고 기사단장은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 되는 굴욕을 당했다. 이후 기사단국은 폴란드의 영향력에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고 폴란드는 기사단국을 복속시키기 위한 전쟁을 계속했다. [[16세기]] 초, 튜튼 기사단의 제37대 기사단장 [[알브레히트(프로이센)|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은 폴란드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으나 상황이 좋지 않았고, 휴전 기간 동안 전황 타개를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의회(신성 로마 제국)|제국의회]]에 참석했으나 [[황제]] [[카를 5세]]는 알브레히트와 기사단에 무관심했고 이에 알브레히트는 제국과 황제가 신봉하는 가톨릭에 회의감을 품었다.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오던 알브레히트는 귀환 도중 우연히 [[뉘른베르크]]에서 열리던 신교도들의 회의에 참석하게 되는데 회의 도중 만난 루터파 신학자 안드레아스 오지안더(Andreas Osiander)[* [[코페르니쿠스]]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의 출간에 관여하기도 했다.]와의 대화를 통해 신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신교의 창시자 [[마르틴 루터]]가 활동하던 신교의 중심지 [[비텐베르크]]로 가서 그 곳에서 루터와 만났다. 루터에게 감명을 받은 알브레히트는 신교로 개종,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오자마자 독일 기사단국의 세속화와 기사단의 해체를 선언했다. 알브레히트는 전쟁을 벌이던 폴란드에게 앞으로도 계속 폴란드의 봉신국으로 남을 터이니 신교로의 개종 및 기사단국의 [[세속화]]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가톨릭]]에 반하는 신교계 공국의 설립임에도 기사단국의 종주국인 폴란드가 이에 찬성하면서[* 당시 폴란드 국왕인 [[지그문트 1세]]는 알브레히트의 외숙부였다.] [[프로이센 공국]]의 건국이 결정되었고 [[1525년]] [[4월 8일]]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에서 체결된 조약과 이틀 뒤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로부터 프로이센 공작의 임명을 받는 의식을 통해 알브레히트 자신은 가톨릭 수도자이자 기사단장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신생 [[프로이센 공국]]의 초대 공작으로 취임했다.[* 기사단장이 이단으로 개종하는 걸로 모자라 기사단의 영지를 자기 걸로 만들자 당연히 기사단 내부는 난리가 났고 격분한 카를 5세는 알브레히트를 당장 제국 재판소에 회부하지만 이미 [[세속화]]를 시전한 알브레히트는 좆까. 하지만 알브레히트는 제국의 동맹인 폴란드가 뒤를 봐주고 있었고 거기다 제국 내 농민들의 대규모 봉기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크리까지 터지면서 제국은 알브레히트를 손볼 기회를 상실하고 만다. 한편 알브레히트의 세속화 결정을 반대한 일부 기사들은 새로 기사단장을 추대한 뒤 프로이센을 떠나 일부 영지가 남아 있는 독일 본토로 향했고 이들은 [[튜튼 기사단]]이란 이름 그대로 [[1809년]]까지 독일 내의 영지를 다스리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해체당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츠 2세|프란츠 1세]]가 구호 단체로 기사단을 부활시켜 현재 기사단은 구호 단체로 존속하고 있다.] 이로써 프로이센 공국은 명목상 [[폴란드 왕국]]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독일 기사단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