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치스코(교황)/생애 (문단 편집) === 흑역사? === [[파일:external/2.bp.blogspot.com/163777412.jpg]]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에 대해 [[http://www.guardian.co.uk/world/2013/mar/14/pope-francis-argentina-military-junta|침묵했던]] [[http://blog.foreignpolicy.com/posts/2013/03/13/will_bergoglios_checkered_past_during_argentinas_dirty_war_come_back_to_haunt_him|전적]]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고 관련 건으로 인권단체에서 [[2010년]]도에 고발된 적이 있다. [[예수회]] 소속의 사제 2명이 독재정권에 납치되어 고문당한 사건에 침묵했다는 의혹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황이 아르헨티나 군부 유력자의 가족신부 등의 개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하여 독재자들에게 사적으로 선처를 호소하였고, 두 사제는 결국 풀려났다고 밝혀졌다.[* 하지만 같은 죄목으로 납치된 [[교구]] 교사 4명과 그들의 남편 2명은 이후 '''실종'''된다. 총 8명이 납치된 상황에서 신부들 2명만 빼낸 것이다.] 비겁해 보일지는 몰라도, 이는 [[쿠바]]의 [[가톨릭]] [[사제]]들도 택하고 있는 나름의 실용적 전략이다. 당장 정권을 전복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직접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타협과 조정을 통해 어떻게든 사람들을 돕는 것도 현명한 전략이다. 게다가 [[교황]]이 군사독재에 찬성한 것은 결코 아니며, 군부의 살인부대에 쫓기는 사람들을 숨겨주고 자신의 여권을 주어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의 개인적인 저항을 적극적으로 했다. [[아르헨티나]] 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성직자들이 '애국주의' 선언을 통해 군사독재와 결탁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지만, 이건 상황에 따른 것이다. 독재와 인권탄압 수준에서 당시 아르헨티나는 [[더러운 전쟁]]이라는 탄압을 벌여 정부를 비판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자루에 넣어져 대서양에 [[수장(장례)|수장]]되거나 [[생매장]]으로 [[끔살]]당했다.[* 당시에는 군사독재 시절 [[한국]]에서조차 적용하지 않던 법적 처벌로서의 연좌제가 당당히 집행됐고, 재판도 없이 그저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만 명을 항공기에 태워 [[대서양]]이나 [[태평양]] 앞바다에 던져버리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제국 주변의 안정이라는 미명 하에 그걸 적극 지원했다.] 적극적으로 전면저항에 나설 경우 베르골리오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국가에서 [[추기경]]이 공개적으로 정권에 대한 반대를 조직한다면 [[교황청]]과 타 가톨릭 국가들의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생명에 위협을 미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전에 언급된 자신의 [[여권]]으로 독재에 탄압받는 정치범을 국외로 탈출시켜주는 행위도, 들켰으면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한 정치범 생존자는 당시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너무나 침착하게 선뜻 도와서 "자기가 어떤 곤경에 뛰어들고 있는지를 정말 알고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특히나 [[호르헤 비델라]]의 습관 중 하나가, 다름아닌 반대 인사를 쥐도새도 모르게 납치한 뒤 자루에 담아서 그걸 헬기에 실은 뒤 [[대서양]] 한복판에 갖다 버리는 짓이었다. 만에 하나, 베르골리오 추기경도 전면에 나섰더면 이 꼴이 났을 것이다. 훗날 순서대로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변호사 부부가 호르헤 비델라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괜히 시골로 낙향한 게 아니다. '''도시는 위험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먼 중앙아메리카의 나라인 [[엘살바도르]]에서는 1970년대에 독재에 저항하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미사]] 중에 대중의 눈 앞에서 사살당했는데도 범인들은 밝혀지지 않았고, 오히려 엉뚱한 사람들이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다.[*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암살범들은 후에 미국에서 대주교의 유족들의 고발로 재판을 받아 유죄판결이 나기는 한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맞서 싸웠던 스탈린주의 이후의 [[공산당]]이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대립했던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그래도 최소한의 눈치를 보느라 말이 통하기라도 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전두환이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가 갑자기 풀어줘서 미국으로 보내버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 국가들이 압력을 넣었고, 전두환은 서방권 눈치를 보긴 했는지라 이에 굴복한 것.] 당시 베르고글리오 신부였던 교황은 "(군부에게) 믿음을 심어줘서 누가 숨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하게 하는 전략을 썼"던 것이다. [[2014년]] 즉위 1주년을 앞두고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2D&sid1=104&sid232&oid=001&aid=0006805523|앞에서는 침묵했지만 뒤에서는 은신처를 제공하고 해외도피를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최소 20~30명, 최대 100명까지 반정부 인사들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3만''' 명이나 희생된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의 참상에서 수백 명 구했다는 것이 침묵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비판은 가능하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분명히 나은 행동이며, 위쪽 문단에서도 설명했듯이 은신처는 물론 해외도피까지 실제로 도왔다는 점에서 자신의 위험도 기꺼이 무릅썼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특히나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벌일 수 있는 일에 대한 한계'''를 생각할 때 이 정도면 꽤 선방한 것이다. 즉 당시에 '''교황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 모든 일에 대해서 교황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비판은 비판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도… 이 부분은 2015년 12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499746001034557002|다루었다.]] 다만 시골 하급 성직자 운운하기는 좀 그런게, 그는 1973년 수도사제로서 맡을 수 있는 상당한 고위직인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이 되 또한 구한 사람은 구한 것이지만, 정작 자신이 체포 등에도 관여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최상단 납치 피해자였던 신부 2명중 한명인 올란도 요리오 신부[* 나머지 생존자 프란시스코 할리스 신부는 이후 [[독일]]로 망명한 이후 은둔생활 중으로,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았다.]는 1985년 재판에서 주교가 명단을 넘겼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2000년대에 벌어진 재판에서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은 수차례 재판 출석 자체를 거부했으며, 단 한번 출석한 재판에서도 모든 증언을 얼버무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교황으로 즉위하는 그 시점에도 그는 재판장에 피의자로 불려다니고 있었다. 교황이 되면서 이 문제가 흐지부지 되었지만, 만일 교황이 되지 못했다면 본격적으로 말이 나올 상황이었다. || [[파일:external/image1.findagrave.com/30767652_122468139050.jpg|width=100%]] || [[파일:external/thumbs1.picclick.com/Circulated-2001-500-Pesos-Chili-Coin-90516.jpg|width=100%]] || || 라울 실바 추기경 || 칠레 500페소 주화 || 칠레의 라울 실바 엔리케즈 추기경과도 대비된다는 견해도 있다. 추기경이자 [[산티아고(칠레)|산티아고]] 대교구장의 직위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맞이했다'''. 엔리케즈 추기경은 해당 쿠데타를 즉각 비난했으며,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살육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쿠데타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서 [[정교회]], [[유대교]], [[개신교]] 등과도 연합해서 대립했다. 그래서 군사 쿠데타가 붕괴된 이후 칠레에서 성인이나 마찬가지 대우를 받았으며, 칠레 500[[페소]] 주화에 그 얼굴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정치적 문제로 대립했다'''라는 이유로 1983년 산티아고 대교구장 직위에서 은퇴해야 했다고 한다. 사실 옛날부터 [[가톨릭교회]] 밖에선 [[요한 바오로 1세]]와 [[요한 바오로 2세]] 시기 로마 교황청이 남미의 군사 정권들을 지지했다는 [[http://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9701&page=1|의혹]]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가톨릭의 텃밭 남미에서 좌파 정권을 몰아내고 집권했기 때문이다.... 정도가 아니라 타 종교에 대하여 보인 유화적인 모습과는 별개로 요한 바오로 2세는 당장 [[폴란드]] 출신의 '''굉장히 반공적이며,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생전과 사후 보여준 성인 같은 이미지 때문에 간과하는 점이지만, 당시 교황청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를 그렇게 백주대낮에 참살하고도 쉬쉬 덮어두는 게 가능했을 리가 없다. [[스페인]]에서도 당장 80년대 프랑코 정권의 잔당인 극우 테러조직 반공 사도 동맹(Alianza Apostólica Anticomunista)를 [[오푸스 데이]]를 통해 지원했다는 의혹도 있고, 스페인 내전 당시 좌파에게 학살당한 성직자들은 시복한 반면, 같은 시기 바스크 정치인들과 사제들이 프랑코 세력에게 학살당했던 바스크 성직자들의 신원 회복과 학살 진상 조사에 대한 협력은 철저히 무시했다. 성직자로서 보인 모범과는 별개로 정치적으로 요한 바오로 2세가 냉전 시기의 진영 논리에 빠져 있었던 건 굉장히 조심스러운 얘기가 아니라 알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판 요소이다. [[요한 바오로 2세]] 참고. 한국에서 군사정권에서 맞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한 가톨릭계 인사들이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한국 가톨릭]]의 특수성''' 때문에 나머지 세계 가톨릭권의 역사나 동향에 대해 크게 아는바 없는 한국인들이 종종 충격 먹는 대목이지만, 가톨릭교회는 원래부터 보수 우익적이고 19세기엔 자유주의, 20세기엔 사회주의와 맞서 싸우는데 열을 올린, 결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며 듣기 좋은 도덕적인 가르침만 하는 집단이 아니다.[* 이런 지점으로부터 비판적으로 접근하자면 프란시스코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의 독재 정권 비호를 받아들여 침묵한 것이지만, 동정적으로 접근하자면 순교를 각오하고 저항해봐야 교황청에게도 '빨갱이물이 들었다'며 외면당한 채 개죽음이나 당할 상황에서 선택할 길이 그리 넓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