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라이토리아니 (문단 편집) === 정치군인 === 이 조직이 로마인들에게 가장 강렬하게 가면을 벗고 등장한 시기는 세야누스가 활개를 치기 직전인, 아우구스투스에서 티베리우스로 넘어간 서기 14년이었다. 로마는 공화정 이래 원로원 내 명예직 프린켑스 직의 부자 승계가 없었다. 따라서 타키투스의 언급처럼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 자신의 아들 티베리우스를 위해 미리 프라이토리아니를 티베리우스가 살고 있던 사저를 둘러싸고 지키도록 명령하고, 프라이토리아니가 명령을 그대로 따른 모습은 분명히 이례적이었다. 이때, 이를 본 원로원 인사들은 프라이토리아니가 무방비가 될 이탈리아와 로마를 방어하기 위한 군대가 아님을 제대로 깨달았다. '새로운 공화정 체제'와 공화국 수호를 외치면서 제정의 기반을 착실히 쌓아나가던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로마가 형식적인 공화국일 뿐 제국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던 것이다. 헌데 이것으로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가 늘 사탕발림으로 원로원을 속였던 터라,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공화국이라는 것을 굳건히 믿던 인사들에게 이후 벌어진 프라이토리아니의 행동은 제국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를 호위한 근위대장 루키우스 스트라보가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정식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이어 근위대장과 대대장들이 무장한 프라이토리아니 병력과 함께 현직 집정관 두 명을 찾아와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주종 관계 형식에 따라 충성서약을 강요했다. 이어 그들은 정식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원로원에게 묵념과 추모를 하도록 명령하고 이를 철저히 감독했다. 즉, 프라이토리아니의 충성과 원로원 통제를 시작으로, 우리가 로마 제정이라고 하는 로마 제국의 첫 세습이 시작됐던 것이다. 헌데 물러날 줄 알았던 프라이토리아니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아우구스투스 장례식에 참석해 공화정기 일반 병사들과 다른 태도를 취하며 참석자들을 놀랍게 했다. 술라, 카이사르 장례식때의 베테랑 퇴역병, 현역병들의 전례와 달리 이날 프라이토리아니는 새로운 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에게 절대 충성을 다짐하고, 계급에 따라 도열해 자신들이 황제와 황제 가문을 절대적으로 따르겠다고 재차 밝혔다. 따라서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 제정을 상징하는 집단이며, 로마 제국 황제 승계에 있어 상징과 같은 부대임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로마 제국 최고 권력자의 직속부대이자 제국의 본국인 이탈리아 내 유일한 무력집단이라는 이 어마어마한 특권에 프라이토리아니가 속된 말로 맛을 들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성은 냉혈한이었고 차가운 얼음 같았음에도 표면상으로는 늘 온건한 지도자 이미지로 치세 대부분을 일관했던 아우구스투스는 통치기간 내내 프라이토리아니를 정치도구로 활용하는 경향을 최대한 억제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와 놀라울 정도로 성격이 비슷했고 10대 시절부터 이미 황제로 갖춰야 할 정치력과 행정가, 군인으로 그 능력이 뛰어났던 그의 양자 [[티베리우스]]가 후임황제로 즉위하면서 이런 경향은 바뀌었다. 티베리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양부와 판박이 수준으로 성향이나 성격이 비슷했고, 무척 성실하면서도 책임감이 강했으며 그 능력은 당시 로마 인재풀 내에서도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는 본래부터 낯을 많이 가리고, 폐쇄적인 성격과 과묵하면서도 인간미가 떨어지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뛰어난 정치력과 행정능력, 10대 후반부터 검증된 군사적 능력과 별개로 로마 시민과 원로원을 배려하는 정치 감각이 부족했던 냉혈한에 가까웠다. 이런 [[티베리우스]] 황제가 즉위하고 얼마되지 않아 두 명의 근위대장 중 한명이 죽고 그의 신임을 독차지한 [[세야누스]]가 사실상 단독 친위대장이 되면서[* 본래는 세야누스와 그의 아버지가 프라이토리아니를 지휘한 친위대장이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를 설득한 세야누스가 단독으로 이를 이끌었다.] 프라이토리아니는 점차 로마 정계에 일정한 역할을 차지하였다. 티베리우스는 모든 로마인들에게 능력은 인정받았고 한 사람으로 본다면 훌륭한 황제였다. 하지만 즉위 이전부터 비정하고 이성적인데다 지나치게 솔직하면서 상대방의 호의도 아부로 생각할 정도로 낯을 많이 가리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원로원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았는데, 즉위 이후에는 상호 간의 불만과 갈등으로 원로원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러다가 후계자들인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연이어 요절하고, 황실 내에서는 친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를 비롯한 여자 황족들과 계속 트러블이 생기면서 결국 인내심마저 바닥이 났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티베리우스의 최측근이자 모사꾼이던 근위대장 [[세야누스]]가 틈새를 노려 신임을 굳히고 티베리우스가 스스로 카프리 섬에 별궁을 짓고 은둔해버리면서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프라이토리아니가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고, '법무집행'이라는 미명 아래 정적 색출과 제거와 같은, 마치 안기부나 국가보위성 같은 일을 하게 되어버렸다. 은둔 통치를 시작한 티베리우스 황제는 세야누스가 이끄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원로원과 잠재적 정적들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했고, 이때 세야누스는 악명을 떨쳤다. 세야누스의 지휘하에서 프라이토리아니는 일종의 비밀경찰 내지는 정치적 의미에서의 친위대로 활동하게 되는데, 로마 시에 근위대가 상주하는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근위대 기지)를 건설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1만 명에 가까운 황제 직속군이 눈에 띄는 형태로 로마 시내를 활보하는 상황에서 원로원을 비롯한 황제 주위의 정치세력들이 느꼈을 위압감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 과정에서 동복동생 [[대 드루수스]]의 손자들을 비롯한 아우구스투스 직계 혈육들이 프라이토리아니를 지휘한 세야누스의 음모 아래 거의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숙청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자체의 혈통이 끊기기 직전까지 치달았다. 설상가상 결국 세야누스가 제위를 노리고 티베리우스까지 위협하고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면서 티베리우스는 마크로를 새로운 근위대장으로 내세우고 소방대와 프라이토리아니를 모두 포섭해 세야누스를 숙청했다. 하지만 이런 티베리우스의 정책은 황제 자신과 그의 가문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로 돌아왔다. 당장 티베리우스의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후계 수업을 받은 황태자 [[소 드루수스]]가 죽은 뒤 황권을 목표로 정치적 야심을 키워나가던 세야누스를 숙청할 당시에도 세야누스의 심복으로 변질된 프라이토리아니의 움직임을 티베리우스 자신이 경계할 정도였고, 황실은 티베리우스 본인과 그의 친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들인 가이우스([[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1세]] 외에는 모두 프라이토리아니의 개입으로 전멸해버렸다. 더군다나 세야누스 제거 이후에는 마크로가 등장해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에 황제와 황실을 위해 반역죄를 이유로 로마를 한바탕 뒤집어 엎으면서 공포분위기가 이어졌고, 이런 후유증은 계속 이어졌다. 따라서 [[칼리굴라|가이우스]]는 카프리 섬에서 티베리우스와 같이 사는 동안,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마크로와 동맹 관계를 맺고, 그와 프라이토리아니의 도움 아래 후계자로 입지를 굳힌다. 이런 이유로 티베리우스 사후, 그는 사촌동생과의 공동즉위임에도 불구하고 마크로와 프라이토리아니의 도움을 받아 단독 제위계승을 하게 됐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즉위 후 그는 티베리우스 시대 후반부터 위세를 떨친 마크로와 그 세력을 반역죄로 숙청하고, 끊임없이 프라이토리아니를 통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동은 당시 프린키파투스 체제가 완벽하게 정착되지 않은 과도기라는 점, 프린켑스와 원로원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상호견제 등과 엮여 좋게 평가받지 못했다. 설상가상 그는 황제권 강화를 위해 황제개인우상화와 같은, 최소 3~4세기 로마 황제와 비슷한 권력개편 시도를 한 데다, 티베리우스가 남겨준 유증금을 일찍 소비한 것이 반대파에게 "흥청망청 돈만 쓴다"고 비난받으면서 민심까지 악화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카이레아, 루푸스와 그를 따르는 20명도 안 되는 프라이토리아니 내 일부는 언제라도 자신들을 숙청할 수 있는 [[칼리굴라]] 황제를 배신했다. 그리하여 서기 41년 1월 로마 역사상 최초로 프라이토리아니가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비무장의 현직 황제를 암살하고 그 일가까지 멸족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칼리굴라는 암살되기 전 자신을 쳐내려고 한 2명의 집정관과 일부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하고, 프라이토리아니에 영향이 컸던 마크로 등을 계속 숙청했음에도 암살 위험을 계속 받던 상황이었다.] 이때 카이레아를 필두로 한 프라이토리아니 20명 안팎은 칼리굴라 황제 암살 전에 자기들 입맛에 맞게 휘두를수 있다고 판단된 [[클라우디우스 1세]]를 미리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고 방에 가둔 뒤 황제 암살을 한 뒤 그를 옹립했다. 이런 이유로 클라우디우스 1세는 프린키파투스 체제 유지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존속, 시해된 조카의 명예회복 등을 고려해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에 도착한 직후, 로마 황제 중 최초로 충성 명목의 하사금을 약속해 지지를 얻는다.[* 클라우디우스 이전인,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역시 황제가 된 뒤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돈을 보너스 개념으로 하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프라이토리아니가 가진 정치적 권력과 본국 내 유일한 무력집단으로서 이들은 황제에게 매우 중요한 무기이자 최측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프라이토리아니 대부분을 사실상 통제, 장악 중인 칼리굴라의 또 다른 근위대장 클레멘스가 딴 마음을 먹지 않고, 9개 대대를 결집시켜 클라우디우스를 인질삼아 끌고 온 황제 암살범들을 체포 후 수감시킨 덕분에 더 이상의 소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하사금 지급 후, 클레멘스를 중심으로 한 프라이토리아니에게 확실한 충성을 받아낸 직후, 카이레아 등 암살범 20명을 인도받아 처형하거나 자결케 했다. 칼리굴라 암살 사건과 클라우디우스 즉위가 있던 41년 1월은 당시 로마인들에게 큰 교훈을 안겨준 사건으로 재차 인식됐다. 로마인들은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황권에 프라이토리아니가 간섭하는 정도가 갈수록 커졌고, 세야누스나 마크로 같은 악랄한 인사가 아니더라도 프라이토리아니 자체가 가진 힘을 재차 깨달았다. 하지만 41년 이후에도 클라우디우스의 즉위와 충성하사금은 아직까지 선례만 남겼을 뿐, 프라이토리아니가 황제의 명에 따라 로마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거나 감시하는 연이은 사건을 일으키진 않았다. 그러다가 네로 시대는 티베리우스 시대 이후 정치 개입을 시작한 프라이토리아니를 황제가 악랄하게 활용하고 이용하는 무기로 일상화되었다. 이런 모습은 클라우디우스 1세가 급사하고 [[세네카]]와 [[소 아그리피나|아그리피나]]가 근위대장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부루스]]와 연합해 [[네로]]를 [[친위 쿠데타]]로 옹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임자의 친아들이 있었고, 어린 정통 후계자의 징검다리로 예정되지 않았던 네로를 앞세운 [[소 아그리피나|율리아 아그리피나]]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의 도움이 있었기에 궁정 쿠데타에 성공했다. 이후 그녀는 부루스, 세네카와 함께 네로를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로 데리고 간 뒤 하사금을 지불한 전임자의 선례를 활용해, 병영으로 찾아가 충성에 대한 보너스를 지급했다. 그리고 이는 황제 암살과 원수정 체제 존속 문제로 벌어진 보너스 지급처럼 엄청 특수한 경우가 아닌 터라 이후 황제들이 해야 할 전통처럼 되었다.[* 클라우디우스 1세 즉위 당시의 보너스 지급은 칼리굴라 암살과 원로원의 공화정 복구선언이 벌어진 상황, 그리고 원로원이 카이사르 가문의 멸문을 논의하면서 혼란해진 상황 수습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새 황제로 옹립된 클라우디우스 1세가 사태 수습을 위해 지급한 보너스였다. 하지만 네로를 앞세운 소 아그리피나와 세네카, 부루스는 자신들의 정권 획득과 공개된 유언장 무시를 위해 프라이토리아니를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충성 맹세 보너스를 지급한 것이었다.] 네로는 아내, 어머니, 고모 등을 제거하는 데 프라이토리아니를 활용했고, 그들을 이용해 끝없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이는 근위대장 부루스의 죽음과 세네카의 정계 은퇴 이후, 함량 미달 수준의 [[티겔리누스]],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네로가 몰락한 직후 숨었다가 원로원 편에 붙었고, 이후 뜬금없이 "내가 칼리굴라의 사생아다!"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면서 황제를 참칭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기에 별 호응 없이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같은 인사들에게 네로가 프라이토리아니를 맡기면서 시작을 알렸다. 특히, 부루스의 후임으로 프라이토리아니를 장악한 티겔리누스는 네로의 입맛대로 프라이토리아니를 [[비밀경찰]] 조직으로 대놓고 활용하면서 비밀공작까지 벌였다. 따라서 티겔리누스 체제 이후, 프라이토리아니 주도 아래 죄 없는 방계 황족들과 [[원로원]] 의원, 장군, [[속주]] 총독, 부자, 유명 시인과 [[명사(동음이의어)#s-2|명사]]들에게 죄를 덮어 씌워지고 그들은 [[숙청]]했다. 그러다가 네로가 몰락하고 '''네 명의 황제의 해'''라고 불린 [[로마 내전|내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오토]], [[비텔리우스]]가 연이어 등장한 이 당시, 네로 몰락에 결정타를 날리고 네로를 자살케 한 집단은 프라이토리아니였다. 이를 주도한 인사는 피소 음모 사건 이후, 티겔리누스의 파트너 근위대장에 임명된 님피디우스 사비우스였는데, 그는 네로와 티겔리누스를 모두 배신하고 갈바 편에 붙었다. 따라서 원로원이 네로에게 '국가의 적' 선언을 할 당시, 네로와 티겔리누스는 힘 한 번 못 쓰고 제대로 당하게 되는데, 이때 황제로 선언된 갈바는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충성 보너스를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네로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자살하였다. 그러나 네로를 실각시킨 갈바는 로마로 돌아온 뒤 "난 전임자처럼 돈으로 충성을 사지 않겠다." 하면서 연례행사처럼 지급된 충성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았고, 갈바 등극의 1등 공신이지만 [[토사구팽]] 당한 오토가 프라이토리아니의 지지 아래 갈바를 몰락시켰다. 하지만 오토 역시 게르마니아 병력을 이끌고 황제를 자처한 비텔리우스에게 몰락했고 내전의 최종 승리는 [[베스파시아누스]]가 등장하며 끝났다. 이후 [[플라비우스 왕조]]와 [[오현제 시대]]라고 불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까지는 황제들이 워낙 유능했거나, 아니면 근위대 자체가 쉴새없이 전선에서 활약해야 했기 때문에 이런 정치군인적 모습이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네르바]] 황제 시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죽음에 의혹을 품은 프라이토리아니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어 네르바를 연금하고 도미티아누스의 암살범들을 독단적으로 참살한 사건이 있었다.[*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삼은 것도 근위대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콤모두스]] 시대까지 정치군인 모습을 지양한 프라이토리아니는 콤모두스 후임인 [[페르티낙스]] 암살에 근위대장이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을 시작으로 황제들 대부분의 죽음과 등극에 프라이토리아니가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가 된다. 친위세력이라고는 하는데, 오히려 그 '친위세력' 때문에 제명에 못 죽은 황제가 그렇지 않은 황제보다 많을 정도니 말 다한 셈.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를 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판노니아 총독 시절 황제 참칭을 하고 로마로 진군해 무력으로 정식황제로 승인받은 직후, 이탈리아 출신들로 구성된 프라이토리아니를 굴복시킨 다음 기존 부대를 해산시키고 아예 판노니아 출신의 부하들로 부대 전체를 대거 교체해버렸다. 그러나 이 조치 역시 측근세력으로의 물갈이라는 미봉책에 불과했고,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근위대장의 권한과 권력은 오히려 더 강화되면서 황제의 최측근이 근위대장 자리를 계속 차지했다.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황태자이자 공동황제였던 [[카라칼라]]가 현직 근위대장인 장인 플라우티아누스를 205년 직접 죽였다.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근위대장 [[마크리누스]]가 217년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들이 카라칼라 황제를 암살했을 때 여기에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그들의 추대로 즉위하기도 했다. 또 [[엘라가발루스]]가 근위대를 이용해 사촌동생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제거하려고 하다가 프라이토리아니가 자체 판단 아래 도리어 명령을 내린 황제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하수구에 버리는 일이 터지는 등 세베루스 왕조 존속 내내 지속됐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진 235년부터 일상화되었다. 3세기 황제들 중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 [[갈리에누스]] 등은 프라이토리아니 또는 근위대장 손에 목숨을 잃었고. 내전이 벌어질 때마다 근위대장과 프라이토리아니는 새 황제 선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 근위대장을 2인 공동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던 사례라든지, 차기 황제가 될 아들 [[티투스]]를 근위대장에 임명했던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이 이끌던 판노니아 군단의 정예병들로 프라이토리아니를 물갈이해버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예 프라이토리아니 자체를 폐지해버린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치는 정치세력으로서 프라이토리아니가 내재한 위험성과 실제로 정치에 개입하거나 황제를 살해하고 갈아치운 수많은 사례들을 경계한 시책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