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라이토리아니 (문단 편집) === 모병 방식과 지원자들의 출신 === 황제와 그 가족들의 개인적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로마군의 엘리트 부대, 본국을 방어하고 행정, 정보 수집 등을 담당한 행정부 역할을 한 황제 직속 조직이라는 특성상 모병과 지원자 선별 모두 특별하기로 유명했다. 부대원 선별은 오늘날 모병 지원제, 공채 모집처럼 지원자를 받기 위한 모병 공고를 각 도시와 마을 회관에 붙이고, 홍보를 거쳐 신청을 받은 다음 시험을 거쳐 선별했다. 아우구스투스부터 티베리우스 시대까지의 프라이토리아니 모병 지역은 본국 이탈리아에 국한했다. 굳이 추가 선발해도 속주 내 퇴역병 건설 도시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지원자를 받고 선별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시대동안 부대원들은 대부분 라티움, 움부리아, 에트루리아, 옛 라틴동맹시들이 많았는데 초반에 많은 수를 차지한 쪽은 에트루리아 지방이었다. 이는 프라이토리아니가 본국 이탈리아 출신 로마인 중 북이탈리아 출신들이 많았던 로마군과 구성부터 차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다음 황제인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시대가 되면서 포강 유역의 키살피나 갈리아 지역까지 포함돼 오늘날 이탈리아 반도 전체로 확대되었다. 라티움, 캄파니아 출신 비율이 줄었던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지역이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아우구스투스와 대 드루수스의 직계인 두 황제의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래에서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들은 약 87~90%가 평균적으로 본국 이탈리아 출신으로, 10~13% 정도는 이탈리아 외부 지역에 국한돼 모병 공고를 하고 지원자를 선별해 받았다. 물론, [[네 황제의 해]], [[다섯 황제의 해]] 같이 내란이 벌어진 경우에는 황제를 따른 로마군 병사들로 충원돼 구성원 중 핵심 장교들은 속주 출신 로마인들이 차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1세기, 2세기까지 프라이토리아니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과 속주 중 퇴역병 정착 식민도시 출신들로 구성됐다. 즉, 라틴 혈통의 로마 제국 원류 시민권자들이 대부분 입대했는데,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 전까지 로마시민권자 중 선별된 이들만 로마군 정규병이 된 것을 생각하면 출신은 게르마니아, 판노니아 출신이라고 해도 그 조상은 거의 이탈리아인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3세기 초가 되면서 바뀌었다. 이렇게 된 이유를 흔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대대적인 프라이토리아니 개혁 때문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반절만 맞는다. 왜냐하면 다섯 황제의 해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집권까지의 기간을 제외하면 프라이토리아니는 세베루스 왕조 성립 이후에도 [[군인황제시대]] 중 3세기 중반 직업군인, 기병대장 출신 황제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탈리아와 식민도시, 각 로마군 하급장교, 황제와 황후와의 연줄로 들어온 속주 유력자 자녀들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같은 비(非) 라틴혈통 로마인들도 프라이토리아니 장교 자리를 차지해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부터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까지 프라이토리아니 모병에 응한 로마청년들은 대부분 기사계급이나 평민들이 많았다. 정치군인, 친위부대 성격으로 아는 경우가 많으나, 관료이면서도 정보원 역할도 해서 세베루스 왕조 시대가 되면 인기가 더 늘었다. 백인대장, 대대장에 진급해 로마 상류사회 진입을 노리는 농촌, 어촌 청년들에게는 합격 후 연줄만 잡으면 후대까지 나은 삶이 보장됐고, 월급 외 부수입도 좋았으니 인기가 없음이 이상했다. 본국 이탈리아 내에서 가장 많은 지원자, 합격자 비율을 차지한 동네는 에트루리아와 키살피나 갈리아 지방이었다. 이 지역은 프라이토리아니가 쇠락과 폐지를 거칠 때까지 늘 지원자가 많았다. 이는 이 분야를 연구한 학자들조차 통계를 내고 인정할 정도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수도권인 로마와 라티움 출신들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부유하기로 이름난 이탈리아 제2 인구밀도를 자랑한 캄파니아 지방 출신들과 합쳐도 평균적으로 10~13% 전후였다. 헌데 에트루리아, 키살피나 갈리아 지역은 구성원이 각각 10%, 28%를 기본적으로 깔고 갔다. 많을 때에는 두 지역은 30~40%를 상회할 정도였다고. 이유는 이 지방의 성격이다. 두 지역은 이탈리아에서도 이름난 농촌+어촌이 결합된 동네로 기름진 토지가 펼쳐진 곡창지역이면서도 인구밀도가 높고 공화정 시대부터 퇴역병 후손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이유 외에도 두 지역이 예로부터 곡창 지역임에도 한두 다리를 건너면 거의 황실이나 친(親) 황제파들과 연결고리가 있어 기준에 부합하는 인재들이 몰렸다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가령,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는 카이사르 가문과 연합한 오래된 [[노빌레스]] 가문과 아그리파, 마이케나스 등의 에트루리아 출신들이 있어 이들의 고향 후배들을 유혹했고,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에는 안토니누스 가문과 안니우스 가문이 에트루리아와 깊게 연관된 까닭에 야심 있고 똑똑한 농촌 청년들에게 프라이토리아니는 굉장히 매력적인 직장이었다. 이중 오늘날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에밀리아 일대인 키살피나 갈리아 지방은 에트루리아 지방과 비교해 약간의 지역 특수성을 이유로 지원률이 부대 해체까지 높기로 유명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전쟁, 티베리우스의 판노니아 안정화 작업을 거치면서 갈리아인, 게르만족 출신 속주민들이 라틴시민권, 로마시민권을 얻고자 이곳에 정착해, 그들의 2세, 3세들이 이탈리아 로마인이 되어 그 지원빈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대가 흐를수록 프라이토리아니 내 이탈리아 출신들은 키살피나 갈리아가 고향인 이들이 많았다고. 허나 3세기 중반 갈리에누스 시대 후반부터 변화가 생기면서 이탈리아 출신들은 줄어들었다. 3세기부터 이렇게 된 이유는, 내란으로 집권한 황제가 등장하거나, 전선을 돌아다니며 군경력을 쌓은 황제들이 등장하면서 황제들이 이탈리아 출신보다는 군대 경력이 있는 로마군 출신이나 자기 부하들에게 우선적으로 모병 공고를 하거나, 특별채용해 보직전환시켰기 때문이다. 더욱이 황제가 전선에 나가 싸우면서 부대원들이 전투병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신병 충원보다 이 편이 황제에게 더 편하기도 하니 어떤 이유로 이렇게 구성이 변하게 됐는가는 짐작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갈리에누스 치세기부터 프라이토리아니는 서방 지역과 동방 지역 로마인들이 지원하고, 서방지역에서 60%를, 동방 지역에서 40%가 선별돼 충원되는 구조로 바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