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퓌러붕커 (문단 편집) == 패전 이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88년 퓌러붕커 폐허.jpg|width=100%]]}}}|| || {{{#000,#fff {{{-1 [[1988년]] 9월, 건설 노동자로 변장한 사진작가 로베르트 콘라트(Robert Conrad)가 잠입해 촬영한 퓌러붕커의 내부. 포어붕커[* [[1936년]]에 1차 완공된 구역.]와 퓌러붕커를 연결하는 통로가 있던 공간이다.}}}}}} || [[제2차 세계 대전]]이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끝난 이후, 퓌러붕커가 있었던 곳은 [[소련군]] 점령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당연히 나치와 히틀러에 대해서는 치를 떠는 [[소련]]이었기에, [[1947년]] 퓌러붕커와 지상을 연결하는 출입구인 콘크리트 구조물을 폭파했다. 벙커의 감시탑은 이 때 파괴됐고, 벙커 내벽은 무너졌으며, 벙커 천장도 폭발의 충격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워낙 단단하게 만들었기에 나머지 공간은 이 폭발에도 버텼다. 12년 후, [[동독]] 정권이 다시 한번 폭파시켰지만 이번에도 벙커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동독]]은 지상으로 드러난 출입 계단 같은 흔적만 대충 흙으로 메우고, 풀이 자랄 때까지 방치했다. 이후 [[1980년대]] 말에 콘라트가 잠입했을 때는 퓌러붕커의 대부분이 지하수에 수몰된 상태였다. [[1986년]] [[동독]] 정부는 퓌러붕커를 포함해 국가수상부 청사, 옛 외무부 청사가 있었던 자리에 대규모 주거 단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자리에 건물을 세우려면 지하의 빈 공간들을 전부 메워야 했다. 이 건설 현장 지하에는 퓌러붕커 외에도 국가수상부와 외무부의 방공호로 쓰인 공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대규모 공사를 벌여 나머지 벙커의 잔해들을 모조리 매립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퓌러붕커가 있었던 자리에 퍼부었던 흙을 거두고, 퓌러붕커의 천장까지 지상으로 노출시켰다. 벙커 천장을 뜯어냈고, 없애기 곤란한 벙커의 외벽과 바닥은 흙과 자갈을 채워 완전히 메워버렸다. 이 공사 기간 중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사진작가 로베르트 콘라트가 건설 노동자로 변장해 30차례에 걸쳐 잠입해 내부를 촬영한 것이 퓌러붕커를 찍은 마지막 사진으로 남았다. 여담으로 콘라트가 퓌러붕커에 잠입했을 때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나치 유적에 몰래 들어왔다는 것보다 서베를린 탈출 혐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지상에선 [[베를린 장벽]]이 퓌러붕커 위를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https://www.spiegel.de/geschichte/hitlerbunker-fotos-a-951137.html|로베르트 콘라트의 잠입 촬영을 다룬 슈피겔 기사]][* 퓌러붕커 이외에 국가수상부, 외무부 청사와 연결된 방공호에도 잠입해 찍은 사진도 함께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