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풍운대전 (문단 편집) == 스토리 == 명나라 [[가정제]] 시절, 명의 해안지역은 [[왜구]]들의 발호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한족이면서도 왜의 해적들을 이끌던 [[왕직]]은 1557년 저장성 성주 호종헌의 설득으로 항복을 하지만 항주성 성주가 투옥을 시켜버리고, 이에 왕직의 양자인 모해봉이 다시 왜구들을 끌어들여 요새를 만들고 약탈을 자행한다. 이에 명나라는 유대유([[홍금보]])를 파견하여 요새를 공격하지만 5개월간 제대로 공략을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단순한 해적집단인 줄 알았던 왜구가 실은 일본에서도 히젠의 지배자인 마츠라 가문의 정예사병이었기 때문에[* 작중연도인 1557년이면 마츠라 타카노부가 당주이던 시절인데 아리마, 류조지 양 가문과 대결중에도 무역을 통한 자금확보와 군비확장에 열중하던 상황이었고, 실제로 왕직과도 연계를 한 일이 있다고 한다. 이런 인물이다 보니 해적의 흑막으로 설정된 듯] 장비나 훈련도가 밀리지 않는 상황에서 뛰어난 전술실행력을 갖춘 쿠마자와(쿠라다 야스아키)의 지휘로 요새에 틀어박혀 방어전을 하니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게 된 것.[* 작중에서 굉장히 신중하고 노련한 지휘관인데 명군을 우습게 보고 공세로 나서자는 야마가와에게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적보다 10배의 병력이 있으면 포위를 하고, 5배의 병력이 있으면 공격을 하라 했는데 우린 천연의 요새 덕분에 1000명의 병사로도 대항할 수 있는 것. 공세로 나섰다간 바로 전멸당할거다"라며 여러번의 승전에도 적국의 병법까지 참고하며 명군을 우습게 보지 않는 신중한 성격이다. 게다가 다른 지방에서 승전고를 올리던 척계광의 존재도 이미 알고 있을 정도로 정보에도 밝은 인물로 묘사된다.] 한 달의 기간 내로 왜구를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은 유대유는 여러 번 공격을 가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수많은 병력을 잃으며 본인도 부상을 당하고 만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호종헌이 [[척계광]]을 불러와 대신 지휘를 맡기게 된다. 하지만 산동에서 정예병력을 지휘하던 척계광은 저장의 병력들이 왜구를 당해내지 못하는 것에 당황하며 새로운 군을 만들 것을 제안하나 이를 거부당하고, 결국 있는 병력만으로 전투에 나서게 된다. 이전 유대유가 매일 같은 시각에 공격하고 후퇴했던 것을 역이용해 며칠간 진만 친 채 시간을 보내 왜구들의 허점을 유도하고[* 마츠라 가문의 사병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진짜 해적과 낭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한 상태여서 전투가 없는 시간이 며칠이나 이어지니 이들의 긴장이 풀어졌고, 마츠라 가문의 사병들과 마찰을 빚기까지 한다] 새벽에 기습을 하여 요새를 함락시킨다. 쿠마자와는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철수를 하면서도 척계광을 노린 암살자들을 배치하는데 유대유가 먼저 눈치를 채서 이를 저지하고, 척계광에게 여러 조언을 해 준다.[* 몇 번 싸워보고 해적들이 아니라 일본 영주의 사병임을 알아채고 이들이 명나라 해적들과 결탁했다는 것 등을 알려준다.] 하지만 전투에 들어서기 전 조정에서 유대유와 척계광에 대한 탄핵이 발생했고, 전투에 승리했기에 척계광은 귀향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유대유는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투옥당한다. 실력, 지력 모두 든든한 선배를 잃은 척계광은 부임지로 이동하던 중, 병사들이 술에 취해 난리법석을 떨다가 자신의 부인을 희롱하는 장면에[* [[척계광]]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척계광의 부인이 한 성격 하는 사람이다 보니 툭하면 척계광에게 화를 내고, 이 당시에도 산동에서 저장으로 임지를 이동할 준비를 하는데 자신의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자신을 두고 갈 생각이었냐며 화를 냈고, 아직 화가 덜 풀려 척계광과 따로 자리를 쓰고 있었다.] 화가 나서 병사들과 싸우는데, 이 병사들이 실은 자신이 지휘해야 할 병사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 상대해야 할 적은 전술에 능한 일본의 정규군인데 명나라 병사들은 이 모양 이 꼴인지라 한탄을 하는데[* 실제로 가정제 시절부터 명나라는 군대가 막장이 된 상황인데 [[경술의 변]]에서 몽골군이 침공해왔을때 제대로 싸울 군대가 없어서 싸우지도 않고 수비만 하여 몽골군에게 학살과 약탈을 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나중에는 고작 53명의 왜구를 무서워하여 맞서 싸우지 않아 왜구가 명나라 해안을 마음껏 약탈하기도 했다.] 의오라는 지방에서 격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금광이 발견되자 한탕을 노리고 몰려온 타 지방 사람들을 무력으로 쫓아내는 의오 사람들을 본 척계광은 이들이라면 훈련만 제대로 시키면 정예병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수장을 설득하여 병력을 늘리고, [[낭선]], [[당파(무기)|당파]], [[등패]], 삼연발 총통 등의 신무기를 도입하고 [[원앙진]]법을 훈련시키며 왜구의 공격에 대비한다. 정예병과 대 해적용 전술을 마련한 척계광은 성과를 올리기 시작하지만 수에서 앞서는 왜군은 부대를 둘로 나눠 일부는 신하를 공격하며 시선을 끌고, 본대는 대도시인 태주를 공격하려 한다. 이를 눈치챈 척계광이지만 의오 출신 병사들의 대부분이 신하에 가족을 두고 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모자란 병력에서 일부를 나누게 되고[* 부하들은 신하를 먼저 구원하고 태주로 향하자고 했지만 척계광이 태주를 방어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나오고, 의주병의 리더격 인물이 척계광의 말이 맞을 거라 확신하고 앞장서서 척계광의 말을 지지해 주어서 반이나마 태주로 선행할 수 있었다.] 결국 양쪽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신하에서는 척계광의 부인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쳐 의주병이 돌아올 시간을 벌고 큰 희생을 치루면서도 방어에 성공. 그리고 결전이 벌어진 태주에서는, 쿠마자와의 계책으로 인해 방패병의 호위를 받는 일본군 죽장창부대에게 원앙진이 밀려서 고전을 하면서도 결사대를 이끌고 어찌어찌 왜군 본진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미 사방이 포위되어 방어에만 급급한 절체절명의 형국이었는데... 후방 호위를 맡으면서 공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던 야마가와([[코이데 케이스케]])가 군령을 어기고 대조총병대를 난입시켜 명군의 등패수들을 쓰러뜨린 뒤 낭인부대를 돌격시킨 그 순간, 결사대에게 시선이 쏠린 틈을 타 겨우 전장에 도착한 척계광의 호준포병이 낭인부대와 본영의 호위병력을 통째로 갈아버리면서 오히려 쿠마자와와 야마가와가 위기에 빠졌고 지휘체계가 붕괴된 일본군은 패주한다.[* 다만 이 패주가 꼭 야마가와가 군령을 어긴 탓은 아니다. 실제로 호준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척계광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양새였고, 소총병들의 일제사격은 등패수 진영을 무너뜨리면서 꽤나 효과를 보았다. 호준포가 등장하지 않고 낭인 돌격이 성공했다면 명군은 거기서 전멸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쿠마자와도 갑자기 난입한 야마가와의 경거망동에 불쾌함을 표하기는 했으나 크게 당황하거나 제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쿠마자와의 판단으로도 야마가와가 끼어든 게 별로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는 셈.] 퇴각하던 쿠마자와는 야마가와를 탈출시키고 척계광과 맞서지만 결국 힘이 다해 자결하고, 척계광은 왜구를 물리친 영웅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