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풍수지리 (문단 편집) == 한국의 풍수지리 == 한국의 풍수지리의 기본개념은 땅의 형세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련시켜 설명하는 자연관의 하나로서, 풍수지리, 지술, 음양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풍수에 의하면 땅은 생적의 존재로서 만물을 키우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에게 주는 혜택도 달라진다고 한다. 길한 정기가 왕성한 장소에 터를 잡으면 그 자손들이 부귀영화와 장생을 누리지만 반대로 흉기가 있는 장소를 택하면 불행을 겪는다는 것이다. 풍수에서는 인간의 성쇠가 완전히 하늘과 땅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는다. 유래는 흔히 [[신라]] 말기에 [[불교]] [[선종(불교)|선종]]의 승려들[* 도선 등]이 [[중국]]에서 수입했다는 설이 대세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생설[* 이쪽은 입지가 좁다.], 신라 중기 도입설 등도 근거가 있어 여전히 논의되는 상태이다. 일단 물기가 샘솟는 땅에 만든 [[원성왕릉]]([[괘릉]])[* 왕릉에 걸 괘 자를 쓰는 이유가 늪지를 메워 만들어서 물기가 항시 고이는 땅이라 관을 걸어놓는 장치를 했기 때문이다.]이나, 여러 신라 왕릉들이 좌북조남의 원칙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사례[* 여러 왕릉급 고분군 중 조성 시기가 이른 [[대릉원]]에서는 중국식 풍수지리의 영향을 그다지 찾아보기 힘들고, 좀 더 이후 시대에 조성된 [[서악동 고분군]]은 두 산이 둘러싼 산허리에 있고 앞으로 넓은 평원이 바라보이는 위치로 중국 위진남북조의 풍수 사상이 부분적으로 도입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동향으로 전형적인 풍수지리와 거리가 있다.]를 봐도 신라 하대까지는 적어도 후세 사람들이 생각하는 풍수지리는 도입되지 않았거나, 알려져 있었더라도 왕실과 귀족계층도 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도입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신라]] 때도 전불 7처[* 천경림, 신유림 등 [[불교]] 이전 고유신앙의 7대 성지를 말한다.] 같은 고유 신앙의 길지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중국식 풍수지리와는 기준이 달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에서 풍수지리학문이 역사적으로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후삼국시대]]로, 신라 말기 이전 도입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이전에는 극히 일부 지배계층만의 고급 지식이었다고 주장한다.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의 [[호족(한국사)|호족]]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선종과 함께 인기를 끌고, 사회 전환의 추진력이 됐을 때였다. 호족들은 저마다 자신의 근거지를 [[서라벌]] 못지 않은 명당이라고 주장해 자기 권위를 확립하였으며, 지방에서 어느 정도 커진 호족들은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신라에 대한 반란 루트를 타기도 했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발전하여 [[조선시대]] 초기에 [[하륜]]을 시작으로 점차 번성하게 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사람이 살아가는 땅인 양택을 중심의 풍수학설이 사람이 죽은 뒤에 묻히는 땅, 음택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설화나 야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신라시대에는 [[석탈해]]가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호공의 집을 뺏었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왕건의 아버지가 [[도선대사]]의 풍수지리로 왕기를 받기 위해 패강진 송악산 부근 즉 개경에 자리잡았다고 하는데, 이는 주거 중심의 풍수지리의 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묏자리가 좋았던 덕에 [[왕]]이 되었다, [[세종대왕|세종]]의 묘를 잘못 써서 장손이 망했다, [[흥선대원군]]이 묏자리를 '만 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두 사람의 황제가 나오는 자리'에 잡아서 [[대한제국]]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등 묏자리 중심의 풍수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유학자들은 '풍수지리는 미신 같은 [[괴력난신]]이니, 그렇게 풍수가 중요하면 공자님이 왜 한마디도 언급을 안 했냐느니 이런 걸 추종해서야 되겠냐'고 신나게 떠들다가 조상 무덤 자리는 풍수지리 상으로 좋은 곳에 잡으려고 몇 대에 걸쳐서 산송을 일삼곤 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밑에 보면 알겠지만 하륜과 정도전 모두 유학자였다. 하지만 하륜은 풍수에 유화적이었고 정도전은 강경하게 배척했다. 현재의 풍수학설은 민간에서는 토착신앙 비스무리한 것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묏자리 잡는 용도로 사용되는 일종의 미신 취급을 받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조상 묘는 명당에 모시려 기를 쓰고 있으며 관공서나 건물의 입주 등 실생활에도 응용되고 있다. 국립묘지, 박물관, 시청과 도청 급의 건물들은 모두 풍수를 고려하여 위치를 선정한다고 하며[* [[남악신도시]]와 [[경북도청신도시]]의 [[전라남도청]], [[경상북도청]]을 보면 은근 서울 축소판 속 경복궁처럼 보인다. 두 도청은 21세기에 해당 자리로 이전했다.], [[홍콩]]은 도시 자체가 풍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에서도 풍수지리가 고려되었다.[* 당시 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자문단에 풍수지리학자인 김두규 우석대 교수가 포함되 있었다. 다만 김두규 교수는 지금의 세종시 위치는 관료과 정치인들의 힘겨루기 끝에 나온 타협의 결과물이며, 풍수학적인 선정은 아니었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지금도 세종시 일대가 풍수로 볼 때는 도읍지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에 이용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물론 정치에 이용된 것치고 좋은 결말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기업 건물이 풍수지리 자문을 받아 짓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도시전설의 영역. 위에서 풍수지리의 본격적 도입이 후삼국~고려초라고 했듯, 한국사에서 풍수지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는 단연 [[개성시|개성]]으로, 도시 배치 자체가 송악산 자락의 지형에 최대한 맞춰져있다. 궁궐인 [[만월대]]를 둘러싼 궁성은 시가지 서북쪽 끄트머리를 차지하고 있고, 궁궐의 정문은 동향으로 나 있으며, 도로망 역시 바둑판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 당나라 도시계획의 영향을 받아 궁궐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바둑판처럼 방리 구획으로 도시를 개발한 [[부여군]], [[경주시]][* 경주는 어느 순간에 신도시로 지은 도시가 아니라 상고시대부터 쭉 신라의 수도였기 때문에 중국식 도시계획과 토착 도시계획이 뒤섞여 있다. 일단 고대 경주의 기본 틀은 보존하면서도 중국식 바둑판형으로 최대한 재개발한 것에 가깝다.], [[서울특별시]]를 생각하고 개성시가지 지도를 들여다본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체제도 어찌하지 못한''' 개성의 그 난개발스러움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고려는 한국 양택풍수의 최전성기였던 시기로, [[묘청]]이 풍수지리에 입각해 천도대상지로 건설한 평양 대화궁도 드넓은 대동강변이 아닌 평양 동북쪽 입불산 기슭에 있다. 서울로 따지면 풍수지리 좋다고 경복궁을 우이동에 박아넣은 꼴이다. 지금의 [[경복궁]] [[한성부]]는 세간에 파다한 인식과 달리 그다지 풍수지리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도시는 아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북악을 좌청룡, 목멱산(남산)을 우백호로 동향하여 궁궐을 배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낙타산(동대문 옆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하여 南面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통 유학자인 정도전은 중국의 모든 황궁과 고려의 궁궐도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임금이 남면해아 하는 것이 유학의 덕목이라고 주장했다. 애초에 형세가 좋다고 하여 처음 도성공사를 시작한 곳은 [[계룡산]] 신도안이었고, 신도안 건설이 중지된 이후 천도논의에서 이 분야 전문직인 서운관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소명당, 즉 송악 잔류를 강력하게 밀었으며, 그 와중에 하륜의 무악천도론도 제기되었다.[* 하륜은 계룡산은 나라 망칠 땅이라고 하였는데 이 하륜은 무악천도에 얼마나 열을 올렸으면 태종때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할려고 할때도 무악천도론을 내세웠다.] 이런 모든 논란을 일거에 잠재운 것이 명에 사신으로 출장갔다가 돌아온 정도전으로, 그는 "쟤들이 음양술수 소리만 해대는데 중국사 봐도 그딴 거 없습니다."라며 한양 천도를 반대하는 풍수쟁이들을 대차게 디스하기도 했다. >이곳[* 무악. 이 때가 태조가 하륜의 주선으로 무악을 돌아보던 시기였다.]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되는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朝市)와 종사(宗社)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평일에 배운 바로써 말하겠습니다.(중략) 천하의 큰 나라로서도 역대의 도읍한 곳이 수사처(數四處)에 지나지 못하니[* 말뜻을 그대로 풀어본다면 중국처럼 큰 나라조차 역사를 통틀어도 도읍지는 세어봐야(數) 4곳(四處)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즉, 중국에서도 역대 수도들을 보면 죄다 장안 낙양 금릉 등등 몇 곳을 계속 돌려쓴다는 말이다.], 한 나라가 일어날 때, 어찌 술법에 밝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진실로 제왕의 도읍한 곳은 자연히 정해 좋은 곳이 있고, 술수로 헤아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후략) >---- >태조실록, 태조 3년(1394) 8월 12일자 2번째 기사. 도시의 입지 선정에 있어서 북악을 진산과 주산, 주맥 등을 따지는 수준의 기본적인 배려는 있었으나 기존에 아마도 풍수에 입각해 지었을 남경 이궁은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대신 북악산 아래에 네모 반듯한 형태로 [[경복궁]]을 새로 지었다. 처음부터 풍수지리를 최대한 따졌다면 아마도 [[창덕궁]]과 같이 비뚤어진 모양새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세종 시절 풍수학자들 간에도 경복궁 자리가 명당이야 아니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과학적 근거는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숭례문]] 화재 당시 수호상인 [[해태]]상이 이전되고, [[서울역]] 앞에 있다던 화기를 가라앉히는 연못은 사라진 지 오래고, 군부 군사 정권 하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육사 출신이 정부 관료들이 퇴진하고 관악산 [[서울대학교]] 출신 고위직이 많아졌을 때 비로소 숭례문에 화가 났다는 말도 있다. 오늘날 매스컴에서 논하는 풍수는 거의 말장난으로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식이 많다. 성공한 사람이 많이 나오면 대충 말로 둘러대서 이러쿵 저러쿵하여 말빨로 대충 처리한다. 미스터리, 심령 프로그램도 '''많이''' 다루는데, 프로그램 연출을 아주 무섭게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