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증 (문단 편집) == [[청백리]] == >'''인종 시대 동안, 포증은 그의 정직함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었다.''' >---- >[[사마광]] [[https://zh.wikipedia.org/wiki/%E5%8C%85%E6%8B%AF|#]] >포증의 성품은 깐깐하고 올곧아, 나쁜 관리들을 혹독하게 대하는 데에 정중을 다했다. 비록 악을 심하게 싫어했으나, 일찍이 충([[忠]])과 서([[恕]])로 자신의 생각을 미루어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구차하게 영합하려 하지 않고, 거짓된 말과 얼굴빛으로 남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고, 평상시에도 사사롭게 글을 쓰지[* 사사로운 이익으로 글을 쓰지 않음.] 않았으니, 지인과 가문 모두 그와 교류를 끊었다. 부귀(貴), 의복, 도구들(器用), 음식이 벼슬이 없던 때와 같은 듯 하였다. >---- >[[송사]] [[https://zh.wikipedia.org/wiki/%E5%8C%85%E6%8B%AF|#]] 가난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가엾이 여겼으며, 언제나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리고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아서 크게 존경받았다고 한다. 유난히 [[부정부패|부패]]한 관리들이 많았던 송나라 때의 사람이라서 더욱 부각되는 듯 하다. 관료 생활을 하는 동안 사적인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사심없이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정치를 펼쳐 백성들에게 인망이 높았다. 이에 [[기득권]]층에게 암살 위협 같이 신변을 위협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 각지에서 무림의 고수들이 자원해서 모여들어 포청천의 신변을 보호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금초군 드라마의 오프닝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부당한 세금을 없애고, [[귀족]], [[황족]], [[외척]]에 의한 횡포로 고통받는 [[민중]]의 [[누명|억울한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해 주었고, [[강도]]와 [[마적]] 떼를 소탕하였다. 판관이 되자 부패한 정치가들을 엄정하게 처벌하였으며, 사치를 하지 않고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청백리로 칭송되었다. 그가 죽자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였고, 이후 민담과 전승의 대상이 되었다. [[판관]]이라고 해서 그의 직업을 법관으로 간주하면 오산이다.[* 그리고 당시의 판관은 별도의 직책이었다.] 당시 송나라는 전근대 동아시아가 다 그랬듯이 [[삼권분립]] 체제의 도입 이전이라 황제가 임명한 행정관료들이 수사와 재판, 처벌을 모두 담당했다. 포청천 역시 여러 곳에서 지방관을 역임하는 동안 고을 주민들의 재판도 함께 맡아 처리한 것에 불과하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수령]], 즉 [[사또]]들이 행정을 담당하는 지방관인 동시에 직접 죄인들을 수사하고 처벌을 내리는 일도 맡은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특히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되는 송의 [[카이펑시|개봉]]부윤을 지낸 것이 가장 유명하다. 그의 활약상을 보면 [[판사]] + [[검사(법조인)|검사]] + [[경찰]]의 [[규문주의|콤비네이션]]. --[[저지 드레드]]?--[* 아닌 게 아니라 [[저지 드레드]] 소설이 국내에 출간됐을 때 '''[[미래]]의 포청천'''이란 문구를 넣기도 했다.] 포청천이 개봉부윤으로 활동한 기간은 가우 원년(1056년) 12월부터 가우 3년(1058년) 5월까지의 1년 6개월간으로 생각보다 짧은 편이지만, 개봉부윤에 취임하기 전에도 부패한 고관들을 탄핵하는 등의 활약도 하였다. 포증은 1037년에 관직에 복귀하여 천장현지현(天長縣知縣), 지단주사(知端州使)를 거쳐 감찰어사대행(監察御史代行),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있을 때 고관들의 부당한 처사를 간하여 탄핵시켰다. 이후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 하북로전운사(河北路轉運使) 등을 지냈다. 1050년에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를 거쳐 지간원(知諫院)으로 재직 중 권세를 휘두르는 귀인 장씨의 인척 장요좌(張堯佐)를 탄핵하였는데 장요좌의 경우 인종의 외척이라 할 수 있기에 당대 정국을 흔드는 대형사건이었다. 실은 장요좌의 경우는 그가 월권을 하거나 큰 비리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으나 귀인 장씨의 권세를 믿고 여러 관직을 겸하려 하였기에 포증이 탄핵한 것이고 실제로 포증 혼자가 아닌 모든 대간들이 인종에게 대항하여 이를 막았지만 주도적으로 나선 것이 당대 지간원이던 포증이었다. 이후 1057년 3월 동경 개봉부 부윤으로 임명, 1060년 3월 이임되었다. 그가 부임시 받았다고 하는 용작두/호작두/개작두는 현재 [[카이펑]]에 현존한다. 작두는 사형(死刑) 중에서도 [[요참형]](腰斬刑) 집행 시에만 쓰던 것으로, 용작두는 황족과 왕족/호작두는 관리와 귀족/개작두는 일반 평민과 천인, 드물게 반역자에게 적용하던 사형기구였다. 포청천은 개봉 부윤으로 재직 중, [[고관대작]]을 가리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내렸으며, 개봉 주변의 마적과 만리장성을 넘어오는 유목민족 도적을 소탕하였다. 또한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부패와 비리를 추상같이 척결하여 이름이 높았다. 이러한 포청천이라 불리는 포증이 송나라 수도를 책임지는 개봉부윤으로 임명된 이유는 송인종의 결단이 있었다. [[인종(송)|송인종]] 치세에 사용된 연호는 다음과 같다. || '''{{{#ece5b6 천성(天聖)}}}''' || 1023 ~ 1032. 11. || || '''{{{#ece5b6 명도(明道)}}}''' || 1032. 11. ~ 1033 || || '''{{{#ece5b6 경우(景祐)}}}''' || 1034 ~ 1038. 11. || || '''{{{#ece5b6 보원(寶元)}}}''' || 1038. 11. ~ 1040. 2. || || '''{{{#ece5b6 강정(康定)}}}''' || 1040. 2. ~ 1041. 11. || || '''{{{#ece5b6 경력(慶曆)}}}''' || 1041. 11. ~ 1048 || || '''{{{#ece5b6 황우(皇祐)}}}''' || 1049 ~ 1054. 3. || || '''{{{#ece5b6 지화(至和)}}}''' || 1054. 3. ~ 1056. 9. || || '''{{{#ece5b6 가우(嘉祐)}}}''' || 1056. 9. ~ 1063 || 인종은 가우 말년에 승하했다. 1010년에 태어나 12살인 1022년에 즉위해 41년 동안 정무를 봤으니 가우 연간 인종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들은 요절한 데다[* 인종의 첫 번째 황후는 곽씨였으나, 투기가 심하고 인종의 얼굴에 상처를 내었다는 이유로 폐위하여 사사하였다. 계후로 [[개국공신]] 조빈의 증손녀인 [[자성광헌황후 조씨|조씨]]를 황후로 세웠지만 슬하의 아들 9명이 모두 요절했다.], 사촌동생인 복안의왕 [[조윤양]]의 열셋째 아들이자 자신의 5촌 조카인 조서를 양자로 삼았다.[* 자식이 없어 양자로 들인 후 인종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다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아들이 다시 요절하는 바람에 다시 양자를 후계자로 삼았으나 궁으로 불러들이지는 않았다. 이후 조서는 [[송영종]]으로 즉위했다.] 태자로 삼은 조서 역시 워낙 병약했고, 양자라고 해도 원래 혈연으로 따지면 친조카도 아닌 5촌 조카로서 물려받는 만큼 정통성에서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인종은 본인 재위 중에 문란한 정치세태를 어느 정도 정리해 놓고 가기 위해 인재를 영입하려 하였다. 정치변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벼슬아치 생활을 제법 했음에도 불구하고 때가 묻지 않았고, 상대가 권력자라고 해도 들이받을 수 있는 배짱이 있으며, 당사자는 불가피하게 위험을 무릅써야 하지만 이미 직급 대비 나이가 많아[* 999년생이 1027년에 진사에 합격했는데, 그후 30년간 즉 거의 [[환갑]]이 다 된 1057년까지 아직 5품이었으면 승진이 굉장히 늦었다. [[원칙주의자]]로서 관료사회에서 소위 [[괘씸죄]]로 찍혀서 인사상 불이익을 여러 차례 받았을 공산이 굉장히 높다.] [[커리어패스]]에 있어서 잃을 게 확연히 적다는 여러 조건에 포증이 들어맞아서였다.[* 장요좌의 탄핵을 주도한 사람이 포증이었기에 권세에 굴하지 않는 성품이 참작되었을 수 있다.] 당시 포증의 관직은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였는데, 5품에서 3품으로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 송의 삼사는 이재(理財)를 맡아보던 세 관아, 곧 염철(鹽鐵), 호부(戶部), 탁지(度支)를 말하는데 국가세금을 다루는 직책이라 중요하지만 그 때문에 중앙에서는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정무를 봐야 했다. 송인종은 지방에서 맴도는 포증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때 처음 맡긴 직책이 개봉부윤[* 정확히는 권지개봉부사] 및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였다.[* 송대에는 대학사를 비롯해서 삼 각에 학사, 직학사, 대제를 두었는데, 그 자리는 매우 명예로운 자리였으며 원로대신, 학식이 뛰어난 신하를 예우하기 위한 자리였다. 포증 역시 용도각직학사라는 자리를 명예롭게 여겨 이를 제일 먼저 칭했다. 또한 송대 수도인 개봉부의 장관은 부윤이지만 공식적, 명목상으로는 친왕 즉 황족이 겸임하는 자리였기에, 황족이 아닌 일반 신하를 임명할 경우에는 권지개봉부사로 임명했다. 권지OOO사의 용법은 한국인에게는 권지고려국사, 권지조선국사가 익숙할 것이다.] 이후 약 2년간 포증은 개봉부윤으로서 백성을 착취하는 황족, 관리들을 수사한 후 참수하면서 청천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송나라의 재판은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러 차례 수사한 끝에 혐의가 확실한 이들을 참수했을 것이다. 이때 포증의 나이는 인종보다 11살이나 연상으로, 가우 원년(1056) 개봉부윤을 지낼 당시의 나이가 58살이었다. 송나라 사료를 봐도 인종이 막판에 기대보는 심정에 파격적인 인사를 했던 것인데 너무 잘 해주니 마음에 들어 1년 반 후에는 개봉부윤에서 승진하였다. 이후 단주부사→ 동부승지→ 추밀직학사→ 추밀부사·간의대부까지 지낸 뒤 사망했다. 사망 직후에 동해군개국후(정3품)→ [[사십구재|49재]]에 예부상서→ 1년 뒤 포증의 기일에 맞춰 이부상서에 추증되었다. 추밀부사·간의대부는 정2품직이고 사망 후에는 제후로 격상되는데, 인종 치세의 사료를 봐도 공이 있는 신하가 죽었다고 저렇게 벼슬을 붙여준 경우는 포증이 유일무이하다. 이러한 그의 업적으로 포증은 오늘날 중국 사회에서 '''정의의 문화적 상징'''으로 존경받는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묘를 만들고 거의 900년간 제사를 올렸으나, 1960년대에 홍위병들에게 박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