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스트모더니즘 (문단 편집) == 역사학 == 역사학계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위에서 기록된 역사가 아니라 아래에서 기록된 역사를 중점으로 역사를 서술하자는 흐름이다.[* 참고로 포스트 모더니즘 역사관만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즉 아래로부터의 역사=포스트 모더니즘 사학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뜻. 오히려 이쪽에 대한 제대로 된 명칭은 미시사(↔거시사, 크게 보는 역사)에 가깝다. 미시사는 포스트 모더니즘 역사학의 주요한 분야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위로부터 기록된 역사란 그 시절의 도표, 농업 생산량, 정책적 논의 등에서 기록된 역사를 토대로 과거를 구성하는 해석 방법이다. 현대의 도표로 현대의 생활상을 표현하는 것과, 과거의 도표로 과거의 생활상을 표현하는 건 당연히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위로부터 기록된 역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당대 현실의 차이가 발생하자, 아래로부터 기록된 역사를 해석하여 당대 현실을 분석하자는 기조가 나오게 되었고, 이것은 역사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과거의 민간 신화, 소설, 민담 등에서 당시 상황과 사상을 유추해 내고,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긴데 단지 그 시절 누군가 이름을 붙여 식자들 사이에서 설레발을 친다고 보는 부류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지식인들을 지금 시점에서 관찰해 보라. 공자도 맹자고 전부 옳은 소리만 한다. 예수님도 옳은 소리만 한다. 정치인들도 다 옳은 소리를 해서 표를 얻는다. 그 시절 도덕관념이 막장이었고 공자가 갑자기 내려와 배움의 기쁨을 설파한들 기록으로 남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이 성인이라 부르며 몰려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흥부놀부 민담에서 놀부는 벌받고 흥부는 흥하는 걸 표현한 걸로 봐서, '''그 당시 누가 빈부격차라고 정하진 않았지만 현대인 수준의 빈부격차 개념은 있었다고 보는 경향이다.''' 기존 역사학, 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선 사실 중심의 서술을 사용하였다. 사실 중심의 서술은 니체를 비롯 많은 철학자들이 지적했듯 동어반복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예를 들어 계몽 사상이 번졌던 18세기의 프랑스는, '''그 이전엔 계몽 사상이라는 서술이 없었으므로 계몽 사상이 없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면 당시 농민들은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봉건제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공식적 역사학 개념에서 보자면 프랑스의 봉건제는 이미 끝장난지 오래였다. 이쪽은 자신들의 문제와 불만을 설명할 다른 용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는 이런 맥락을 무시하고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봉건제에서 찾는, 현재의 개념에서 보자면 바보짓을 한 것이다. 앙시앙 레짐(구체제)으로 설명한 서양쪽에서는 그나마 이것저것 다 포괄했지만, 프랑스 봉건제의 모순이라고 배운 대한민국 등의 경우에는...] 이러한 근대사학의 한계를 담론과 의심, 그리고 비판을 통해서 뛰어넘으려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 사학의 큰 관심사다. 위의 언급된 것만 보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학의 한 분파로 자리잡은 듯한 느낌도 들겠지만, 이건 미시사나 해석론과 엮여서 소환된 경우이다. 실제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역사학과 처음 충돌(접목 정도가 아니다)했을 때는 이정도가 아니었다. 특히 극도로 비판받은 것이 랑케로 대표되는 "역사학에 과학성을 도입한 부류"[* 랑케의 수제자에서 일본의 쓰다를 거쳐서 이병도까지 이어진 문헌고증학류의 실증주의사학이 팽배했던 대한민국의 경우는 그야말로 직격타였다.]이고, 그에 대칭적이라는 카 마저도 비판 대상이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학을 바라본 시각을 단적이자 단정적으로 말하면 '''역사학이 만약 과학성을 추구한다면 역사학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수준이었다. 역사는 그 도구의 불완전성으로 인해서 과학일 수도 없고[* 역사는 텍스트로 기록되는데, 그 텍스트 자체가 과거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계층적 문제점도 있지만, 텍스트는 작성된 시점에서 이미 사실과 차이가 있고, 그걸 해석하는 과정에서 한 번 더 틀어진다. 이 관점에서 보면 역사학은 '그림을 묘사한 말을 듣고 그려낸 새로 그려낸 그림이 이전의 그림과는 같은 그림일 수 없다'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다. 여기에 그림을 묘사하는 사람의 언어적 능력, 배경이 포함된다면 더더욱 그렇다.], 역사학자들이 그 나름대로 그 텍스트를 해석한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수준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해를 제약하기 때문에 악이라고까지 이해된다.] 마땅히 해체해야 한다는 수준까지 나간 것이다. 때문에 포스트 모더니즘 관점에서 역사는 당연히 역사학자의 '주장'[* 그래서 크로체 정도가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선구자로 꼽힌다.]으로, 문제는 역사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역사학자들이 그려내는 역사가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보편담론으로서의 역사학은 해체된다.] 역사가 '어떻게' 형성되어왔느냐이다.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책들은 역사 자체를 다룬 글보다는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다룬 형태를 해체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흡수와 반응이 아날학파, 미시사, 현재주의 역사학, 오리엔탈리즘,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포스트 히스토리, 환경사 등으로 제각각 등장하는 것이다. 다만 워낙 포스트 모더니즘 역사학이 난해하다 못해서 도저히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학 해체하고 밥벌이 잃을 판인 기존 역사학자들은 물론이고 자기들끼리도 물론이다.], 그나마 기존 역사학계에서 공감대를 형성한 미시사 등이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학계에 낳은 논쟁(문학과 역사학의 차이점이 무엇이냐?)에 대한 역사학계의 대답은 이렇다. 문학은 창작을 위한 것이지만, 역사학은 객관적 사실을 위한 것이다. (비록 역사학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학문일지라도 과학적 방법론을 가지고 사실에 접근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관련 책으로 포스트 모더니즘 역사학 자체를 다룬 것으로 좀 정리된 책은 *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 포스트 모더니즘과 역사학 * 역사학을 위한 변론 * 새로운 문화사 미시사에서는 * 고양이 대학살 * 치즈와 구더기 * 마르탱 게르의 귀향 아날학파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상극이다. 아날학파는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등장했다. 더욱이 아날의 기본적인 사관은 개량적 사회경제사다. 이후 아날 3~4세대로 가면서 문화사를 강조하긴 하지만 여전히 그 기반은 '물질'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관의 영향을 받은 신문화사와 아날 후세대가 겹치는 바가 있어서 종종 오해를 받지만 둘은 정말 다르다. 환경사에서는 * 녹색세계사 등이 있다. 전반적으로 미시사나 환경사를 다룬 책들이 그나마 쉽게 쉽게 읽히는 편이다. 특히 <고양이 대학살>은 문과 계통 공부를 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고전이고, <녹색세계사>는 환경사라는 장르를 열었다는 평을 받을 정도의 명저로 환경에 관심이 있다면 역사를 떠나서 볼만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