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역사 (문단 편집) == [[이베리아 연합]] 결성과 해체 == 아비즈-베자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던 세바스티앙 1세가 국력을 총동원해서 무리하게 시행한 모로코 원정에서 후사 없이 전사했고 세바스티앙의 삼촌인 추기경 엔히크가 환속해서 왕위에 올랐지만 얼마 후 노환으로 죽어서 왕실 직계 혈통이 끊겼다. 이것을 노린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어머니 [[포르투갈의 이자벨]]이 포르투갈 공주라는 이유로 왕위 상속권을 주장하면서 아비스 왕조의 방계 혈통으로서 왕위를 요구한 안토니우를 몰아내고 무력 합병해 [[이베리아 연합]]으로 편입시키고 압스부르구-필리프(합스부르크-펠리페) 왕조를 열어 자신이 포르투갈의 왕 필리프 1세로 즉위했다. 형식상 스페인-포르투갈의 [[동군연합]]이지만 그 지위는 스페인의 핵심인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아래였다. 그렇지만 이베리아 연합으로 흡수된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였던 리스본의 인구는 1600년에는 100,000명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많았을 정도였다. 이후 포르투갈의 독립 세력은 [[포르투갈 독립 전쟁]]을 일으켜 [[스페인]]에게서 결국 독립했지만 국력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이때 동군 연합 시기 이전부터의 동맹이었던[* 공식적으로 동맹이 체결된 것은 1386년부터로 이미 이때부터 계산해도 현재까지 유지되는 세계 최장 기간의 동맹 관계지만 포르투갈 건국시기와 대 이슬람 레콩키스타가 한창이던 1186년 리스본 공략전에서도 잉글랜드인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인 십자군의 원조가 전투의 승리와 함께 성공적인 건국을 이뤄낸 것을 생각하면 양국의 동맹 관계는 거의 900년에 가까운 유구한 역사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아서 안 그래도 친했던 영국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국력 자체가 압도적이지 않았고 반대로 영국은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서 17세기 이후의 포르투갈은 영국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그래도 포르투갈이 영국에 끼친 결정적인 문화적 영향이 하나 있다. 바로 홍차 문화.] 독립하고 나서부터는 인구가 다시 빠르게 증가해서 1700년 무렵에는 2,000,000명 정도가 되었고 1700년에 리스본의 인구는 170,000명에 달했지만 국력은 많이 증가시키지 못했다. 1755년 11월 1일에는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가 수도 리스본을 덮쳐 큰 피해를 입었다.([[리스본 대지진]]) 이때 최소 3만 명이 사망했고 7만 명 가까이 피해자가 발생했는데 하필 이 날은 가톨릭의 축일인 만성절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있다가 떼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리스본의 사창가는 대부분 무사했기 때문에 이 참극은 유럽 각지에서 종교적 신념이 약해진 계기 중 하나로도 많이 언급되는데 종교적 명절에 사망자 대다수가 독실한 신도에 많은 교회들이 무너진 반면에 더럽다던 사창가가 무사했으니 정말 신이나 예수가 있는 거냐며 유럽 각지에서 계몽주의 학자들은 "이것 봐라, 예수니 뭐니 믿어도 이건 뭐냐? 어디 좀 설명 좀 해봐라!" 라고 주장했고 유럽 각지에서 [[무신론]]도 널리 퍼지는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해서 교황청도 당황해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어이없는 논리지만 그만큼 당시의 기독교 신앙은 실천적, 생활적인 측면이 강하기도 했다. 그래도 리스본은 다시 도시를 회복하고 1800년에는 인구가 180,000명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