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역사 (문단 편집) == [[대항해시대]] == [[유럽]]에서도 서쪽 구석 끝에 위치했고 대서양 바다에 접근하기도 쉬워서 일찍부터 진출하려고 했다. 기존의 [[지중해]]-[[오스만 제국]]-동방 루트를 대체하기 위해서 15세기 초부터 [[엔히크 왕자]]의 주도 아래 [[아프리카]]로 탐험대를 보낸다.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희망봉]]을 발견하고 이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해 대박을 치게 된다. 한때는 교황의 중재 아래 [[스페인]]과 더불어 [[토르데시야스 조약|토르드질랴스 조약]][* 포르투갈어로 읽었을 때의 발음.]으로 세계를 분할할 정도의 해양 강대국이었다. 과거 주요 식민지로는 [[브라질]], [[아소르스 제도]], [[모잠비크]], [[앙골라]], [[상투메 프린시페]], [[카보베르데]], [[기니비사우]], [[동티모르]], [[마카오]] 등이 있었다. 유일하게 남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식민지인 브라질은 스페인의 콜럼버스가 신대륙(아메리카)을 발견하고 8년 뒤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발견했는데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나눈 선보다 동쪽에 있어 포르투갈령이 되었다. 스페인의 경우는 소수의 [[콘키스타도르]]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대군조차 야전에서도 거뜬히 상대하고 심지어 스페인 군견 한 마리가 원주민 전사 세 명과 대등한 전투력을 지녔던(...) 반면 포르투갈의 경쟁 상대들은 오스만 제국이나 [[맘루크 왕조]] 등 쟁쟁한 나라들이 많았다. 이런 나라들은 중앙집권화가 잘 되어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웠으며, 소규모 탐험대가 어설프게 야전을 벌였다간 우수한 화기를 보유한 대군에게 포위당해 전멸당할 위험이 컸다. 그래서 [[포르투갈인]]들은 먼저 해안 거점 지역에 석조 요새를 건설하고 대포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영토를 넓혔다. [[명나라]]에서는 젖은 화물을 말린다며 땅 하나를 빌려놓곤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영구 임대해 갔는데 그게 [[마카오]]다. 그래도 동방에서도 포르투갈 군대의 위력은 상당해서 불과 7백 명의 콘키스타도르들이 2만 명이 지키는 말라카를 점령하고 식민지를 세우기도 했고 이것을 기점으로 명나라에 유럽식 화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페르디난드 마젤란|페르낭 드마갈량이스]]도 포르투갈 출신.[* 그러나 이미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한지라 대서양과 대부분 스페인 땅인 아메리카 대륙을 건너 아시아로 간다는 마젤란의 항해 계획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이로 인해 포르투갈이 독점한 인도항로를 대신해 새로운 동양과 무역로를 개척해 이익을 보고 싶었던 [[스페인 국왕]]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의 후원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포르투갈의 위상은 상당했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로서 해상제국으로서의 위치는 스페인보다 한수 위였을 정도, 유럽의 한 사신이 동쪽으로 가다가 [[서남아시아]] 지방에 잠시 정박했는데 현지 군인 장교가 사신을 보더니 [[포르투갈어]]로 말을 걸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것은 당시 포르투갈어가 적어도 유럽과 중동에서는 국제어 중 하나의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1500년 무렵에는 인구도 1,000,000명 정도로 많지는 않았지만, 스페인과 다르게 유대인들을 추방하지 않고 명목상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해외 식민지 개척에 이용하고,[* 특히 브라질] 군인들과 선원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는 서아프리카에서 수입해온 흑인 노예로 충당하였다. 인도양의 해상 무역 루트를 노리고 자주 소규모 군사 원정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나 이슬람 토후국들과 소말리아, 인도네시아, 인도 등지에서 싸우기도 했고 동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해 발판으로 교역의 발판으로 삼은 뒤 [[오만]]과 [[호르무즈 해협]]을 잠시 정복하기도 했다.[* 잠시라고는 해도 거의 150년 간이었다. 나중에 오만 내륙 지방의 이슬람 제후와 오스만 연합군에게 밀려서 모조리 빼앗긴 뒤 동아프리카 스와힐리 지역도 남부 모잠비크 지역을 제외하곤 대부분 다 뺏긴다. 이후 오만이 [[오만 제국|오만 해상제국]]을 세워서 서구 열강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지배한다.] 심지어 [[미얀마]]의 용병대장 필리페 드 브리투가 미얀마 남부에 자신의 국가를 세웠다가 나중에 미얀마에 쫒겨나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말라카]]와 [[동티모르]] 지역도 점령하였고 [[스리랑카]]도 잠시 정복해서 장대한 해상 제국을 세웠다.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쳐들어간 적도 있지만 당시 인도는 [[무굴 제국]] 체제에서 [[악바르 대제]] 같은 명군인 황제들이 통치하고 무기나 병력 수, 장비, 사기에서도 절대로 뒤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포르투갈 원정군이 제압당하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도 포르투갈군은 인도 남부의 소규모 제후국들이 다스리는 해안가 지방에 석조 요새를 건설하고 대포를 설치한 후 캘리컷이나 [[고아(인도)]] 같은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다. 인도를 점령한 후 캘리컷에서 유입된 [[커리]]가 포르투갈 요리에 흡수되었다. 바로 고아 지방에서 먹는 빈달루 커리로 커리 중 돼지고기가 들어 가는 유일한 커리다.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의 영향으로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둘 다 잘 안 먹고 양고기, 염소고기, 닭고기를 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인도]] 무역의 혜택을 보면서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자금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시작한 포르투갈 왕실에 의해 국가 산업이 변화하게 된다.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그렇게 큰 국가는 아니었는데 지나치게 원양 교역에 집착한 덕분에 국내 산업에 완전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의 해외 무역은 수익률은 좋긴 했지만 인도로 떠난 상선의 '''반이 돌아오면 초대풍작'''일 정도로 ~~손실을 입기 딱 좋은~~ 리스크가 아주 큰 사업이었다. 당시에는 이것이 성공만 하면 수입이 엄청난 모험이기는 했다. 예를 들어 마젤란의 탐험대는 탐험 도중에 배를 1척 빼고 전부 침몰되었지만 이 1척이 가지고 온 상품들이 탐험에서 잃은 것들은 전부 메꾸고도 남을 정도였다. 문제는 자금은 그렇다 쳐도 배와 숙련된 선원 등이 쉽게 증산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에서 한계도 있었다. 이런 무역과 식민지 전쟁은 포르투갈처럼 내실이 탄탄하지 않은 규모가 작은 국가가 지속해나가기는 어려웠다. 지역 세력의 반발과 주변 국가들의 침공으로 몇몇 오지를 제외하고 알짜배기 땅은 점령했다가 도로 빼앗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포르투갈은 해외로 파견한 군인과 선원들의 생존율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선원들이 탈영하는 일도 흔했으며 심한 경우 '''포르투갈에서 새로 파견 나온 신병들이 식민지에서 먹을 게 없어서 현지인들에게 구걸하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왕실은 무역으로 쓸어담은 부를 군인과 선원들을 보상하는데 쓰지 않고 부정 축재를 하니 국가도 피폐해졌다. 게다가 바다로 나간 남자들이 폭풍과 함께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나중에는 군대에 징집할 남성마저 조금 부족해졌다.[*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인도양 해상 무역을 장악한 [[네덜란드 공화국]]의 경우 이웃 [[독일어권]] 국가들에서 온 빈농 출신 이민자들로 선원을 충당한 덕분에 이런 문제가 별로 없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상당수는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한 현지인이 중추가 되어 운영되었는데,[* 일례로 [[포르투갈령 스리랑카]]의 경우 2만 대군을 동원할 때 포르투갈 본토 출신 병력은 천여 명 정도에 나머지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스리랑카 현지인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 남인도인 용병으로 메꿨다.] 나중에는 심지어 포르투갈 본국을 지킬 병력조차 턱 없이 부족해져 식민지에서 온 흑인이나 해외 징집병으로 보충하지 않고는 국방이 불가능해졌다. 포르투갈은 이미 대항해시대부터 흑인 해방 노예와 본토의 백인 여성과의 출산이 일상적이었고 [[흑백혼혈]]이 많았으며, 인도계와의 혼혈도 꽤 이루어졌다.[* [[고안 가톨릭]], [[콘칸인]] 문서 및 오늘날 포르투갈 본국으로 간주되는 [[아소르스 제도]] 문서 참조] 다른 한편으로 포르투갈의 식민지 가톨릭 강제개종 정책은 식민지에서 믿을 만한 병력이나 인원을 무상으로 징집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대신 에티오피아에서는 현지 [[오리엔트 정교회]] 기독교인들과 충돌하여 식민지를 내륙 일대로 확장하는데 실패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남인도 케랄라의 기독교인 공동체나 스리랑카 역시 포르투갈의 강압적인 종교 정책에 질려 네덜란드 쪽으로 투항하였다. 17세기에는 16세기 초에 [[이집트]] 지역의 [[맘루크 왕조]]의 [[해군]]을 격파할 정도로 강성했던 해군도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포르투갈이 구축한 교역망에 다른 유럽 국가인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 등이 진입해 포르투갈의 인도양 세력권은 약화되기 시작한다. 1612-1613년에는 [[스리랑카]] 동부 칸디 왕국의 해군 선단이 스리랑카 서부와 인도 남부의 포르투갈령 항구를 공격해 포르투갈이 패배하고 수십 척의 배가 손실되기도 했고 1622년에는 잉글랜드의 도움으로 [[사파비 제국]]에 호르무즈를 빼앗겼다. 17세기 중반에는 동남아시아에서도 완전히 수세에 몰려 현지의 조호르 술탄국과 연합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세력에 1641년 [[말라카]]가 점령되는[* 1606년에도 네덜란드-조호르가 말라카를 침공했던 적이 있었지만 이때는 포르투갈이 수비에 성공했다.] 등 소순다 열도의 플로레스섬과 [[티모르 섬]] 동부와 두 곳 사이의 소규모 도서 지역을 제외하면 모든 세력권을 네덜란드에 빼앗겼다. 1696-1698년에는 [[오만 제국]]이 동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 [[몸바사]]를 공격해 제주스 성채(Forte Jesus de Mombaça)를 함락하고 몸바사를 점령했다. 결국 18세기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인도 해안지대[* 이마저도 그리 안정적이지 못했다. 18세기 중반 포르투갈령 인도는 [[마라타 동맹]]의 침공으로 4년간(1737-1741)의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가운데 1739년 아라비아해에서 포르투갈의 중요 거점이었던 바사잉(Baçaim, 오늘날의 바사이)이 마라타에 점령당했다.], 소순다 열도 일부, [[모잠비크]] 지역만을 식민지로 유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