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화선 (문단 편집) == 의의 == [[영해]]로서의 평화선은 [[독도]]를 확실하게 지켜냈다는 결과를 안겼다. 일본이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고 있지만 실효지배를 하는 국가는 [[대한민국]]이다. 또 목전에 앞둔 한일 회담에 임하여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일본]]에게 심리적 압력을 주어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동시에 [[한국]] 어족 자원을 보호하고 한국 [[주권]]을 내외에 선양한 [[이승만]]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333-334] [[연합군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 제6조에 '이 지령 가운데 어떠한 것도 포츠담선언 제8조에 언급된 여러 작은 섬들의 최종적 결정에 관한 연합국의 정책을 표시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최종 합의문에는 아예 독도(Takeshima)라는 단어 자체를 삭제함으로써(초안에는 한국 측, 일본 측 오락가락 옮기다가 결국 삭제한 것이다.) 한국의 독도 주권은 완전히 인정받지는 못한 상태였다. 또한 미국은 [[러스크 서한]]을 몰래 한국에 보여주며(연합국은커녕 일본에게도 전달하지 않았다.) 한국에게 독도를 포기할 것을 은근히 요구하고 있었다.[* 미국이 이런 오락가락하는 태도는 한국전쟁의 전개양상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 대한민국이 전세에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때에는 독도 영유권에 대한 해석이 대한민국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며, 공산군에 의해 수세에 몰리며 대한민국 정부의 존립 자체가 불투명할 때에는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곤 했다.] 이렇듯 대한민국의 영토주권이 위태로울 때 '''직접, 실력 행사를 통해 수호하며''' 일본에게 충격을 안김으로써 더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인식시킨 것이다.[* 이승만의 단호함은 [[반공포로 석방 사건]] 등에서도 드러나며, 적절한 약팔이(...)와 벼랑 끝 전술을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엄청난 수확을 가져다주었다.] 영해로 선포함에 따라, 한국 어민들도 폐지되기까지 근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어로 활동에 있어 굉장한 혜택을 봤다. 원칙적으로 일본 어선의 접근이 금지됐으니까... 비록 나중에 어로 활동과 관계된 한일 어업 협정을 체결했고, 1998년 일본이 한일 어업 협정을 파기했고, [[김대중]] 정권은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했지만 이때도 어업 협정을 통해 한일간 독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또한 독도의 영유권과 연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독도가 EEZ 안에 들어옴에 따라 일본의 발언권이 강해졌다는 의견도 있고 [[외환위기]] 시절이다 보니 일본 자금을 들여오기 위해 정권이 몸이 달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낭설에 불과하다.] 이 공적은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도 이것만큼은 인정하는 몇 안되는 업적으로 이승만의 탁월한 외교감각[* 당시 일본은 패전 직후라 주권이 없는데다 당연히 해군도 없는 상태라서 지킬 수 없었고, 미국은 공산군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을 엿볼 수 있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인 박사 1호'''임을 상기하자.] 당연히 일본 극우에서는 독도 떡밥 관련해서 매우 치를 떨고 있는 사안이기도 해서, 독도 문제들로 싸울 때 이때 당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 내에 존재하는 독도 영유권 주장 관련 전시관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평화선 관련 언급이다. 한편 한국 관광객 유치에 힘쓰는 [[시마네 현]] 본토와는 달리 [[오키노시마초]] 지역이 유독 독도 영유권 주장에 극성인 것 역시 어업 이권 문제와 연관이 크다.] 한국에서는 [[반민특위]] 강제해산 및 친일파 미청산 등의 문제로 인해 이승만을 친일적 인물로 보는 시각이 간혹 있는데, 이는 오해의 여지가 있는 시각이다. 역으로 일본에서는 평화선 설정으로 인해 이승만을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도 가장 반일적인 대통령이라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도 위의 월드컵 때의 일화에서 보듯 이승만은 매우 반일 성향이 강했다. 애초에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1904년에 대한제국의 국체보존을 위한 임무를 띄고 미국으로 갔으니 경술국치 6년 전부터 반일 활동을, 그것도 광복 때까지 쉼없이 해왔다. 그의 사망 당시 나이가 90이었으니 인생의 반 가까이 반일 독립운동에 힘쓴 사람이니 오히려 가장 반일적인 대통령인 게 너무 당연해 보인다.] 60해리는 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를 조금 넘는다. 독도처럼 자연섬이긴 해도 무인도의 경우 영해의 기점이 되는지 여부가 분쟁이 있을수 있으나[* 현재에도 논란은 있으나 대체로 독도의 경우 EEZ의 기점은 될 수 없어도 영해의 기점은 된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2019년 러시아 군용기 독도 영공 무단 침범 사건|2019년 러시아 비행기에 경고사격을 가한 사건]]에서도 독도를 기점으로 한 영해와 영공을 침범당한 것이다.], 60해리를 영해로 설정해버리면 명백한 영해의 기점인 울릉도 때문에 그런 논란과 아무런 관련없이 독도 주변까지 영해가 된다. 애초에 60해리로 결정한 기준이 독도때문임이라 추측이 가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