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평양시 (문단 편집) == [[평양시/역사|역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평양시/역사)] || '''시기''' || '''당시 명칭''' || || [[고조선]] || [[왕검성]] || || [[원삼국시대]] || [[낙랑군]] 조선현(朝鮮縣) || || [[고구려]] || [[안학궁]]/[[대성산성]] → [[평양성|장안성]] || || [[남북국시대]] || 평양주(平壤州) || || [[고려시대]] || 서경 || || [[조선시대]] || 평안도 [[평양부]] || || [[구한말]] || 평양부 평양군 || || [[대한제국]] || 평안남도 평양부 || || 1914년 || [[대동군]](大同郡) 신설 || || 1946년 || 평양특별시(平壤特別市) || || 1952년 || '''평양시(平壤市)'''(직할시) || 평양은 약 기원전 3세기(고조선, BC 194년 이전)에 건설되어 경주(신라, BC 57년), 서울(백제, BC 18년)보다 약 200여 년 더 앞서 건설되었다. 이른바 '단기위고 3천년'[* [[대한제국]] 말기 즐겨 불러진 평양가 1절의 가사이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고구려]] 모두 평양에 도읍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인데, 후술 하듯 상징적인 표현일 뿐 고조선 후기와 고구려 장수왕 ~ 보장왕까지의 수백년만 수도였다.]의 도읍으로, [[고조선]][* 보통 [[연나라]] [[연소왕|소왕]]이 [[진개]]를 보내 고조선을 격파한 해를 기원전 281년으로 보는데 그 무렵에 요동 지역에서 평양 일대로 수도를 옮겼을 것이라는 게 현재로선 다수설이다.], [[고구려]], [[고려]][* 921년부터 1136년까지 215년간 고려 '제2수도'였으며 수도로서의 서경의 입지는 [[훈요십조]], 지방행정, 분사제도, [[서희]]의 담판 발언, [[서경별곡]] 등에서 드러난다. 1136년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의 지위는 '부수도' 지위로 격하되어 개경이 아닌 동경, 남경의 그것과 비슷해졌다.]의 [[고도(도시)|고도]]이자 현재는 [[북한]]의 [[수도(행정구역)|수도]]. [[한국사]]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역사적으로 거의 항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큰 곳이다. 손꼽히는 고도인 [[서울특별시]]나 [[경주시]], [[개성시]]에 못지 않는데, 평양은 한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수도였고[* 중심지 이동설에 따라 고조선 후기에만 평양 일대가 수도였던 것이 다수설이다. [[고조선]] 문서 참조.], [[고구려]] 후기의 수도[* 건국 자체는 [[졸본성]](현 [[오녀산성]])에서 이루어졌고 2대 왕인 유리왕 대에서는 [[국내성]]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미천왕]]이 [[한사군]]을 축출한 이후 평양의 중요도가 늘어나다가 [[장수왕]] 대에 들어서야 수도가 된 것.]였다. 수도의 지위를 잃은 이후로도 [[고려]]시대의 3경[* [[개성시|개경]], [[경주시|동경]], 서경. 서경은 특히 태조 왕건의 훈요 10조로 인해 수도 개경보다는 격이 낮으나 동경과 [[서울|남경]]보다는 격이 높은 제2의 수도였다. 다만 [[묘청의 난]] 이후로 격하당해 분사제도가 폐지되어 동경, 남경과 격이 같아지고 평양이 초토화된 원간섭기 이후 고려 말에는 제2도시 위상을 남경에게 빼앗긴다.] 중 하나였고, 조선시대 [[서울특별시|한성]]에 이은 제2의 도시, [[북한]] 정권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수도가 되었다. 이에 평양에는 남한의 서울이나 공주, 부여, 경주, 김해 못지않게 전통유적이 많다. [[동명왕릉]]을 비롯한 고구려의 유적과 [[고려]]시대 유적이 특히 많은 편이며 비록 이후에 개건한 것이고 날조 논란도 많지만 [[단군왕검]]을 모시는 [[단군릉]]도 있다. [[숭령전]] 같은 조선시대에 중요하게 여겨진 유적도 있고, 멀쩡한 것은 이쪽이 더 많다. 평양 시가지 외곽에 조선시대 이전의 유적이 있는데, 그것도 공주, 부여, 경주 같은 느낌으로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미 고려시대 말부터 파괴된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전란의 피해가 비교적 약한 남한조차도 여몽전쟁 시기 이전에 지은 건축물은 매우 찾기 힘들다. 아예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북한이 개발되거나 통일되면 이러한 전통유적 보존 및 교토 같은 고도의 분위기를 풍기는 도시로 발전을 기대할 수도 있다. 다만 한국전쟁 당시 평양이 미군의 집중적인 폭격으로 인해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지라 근교의 왕릉급 무덤 정도를 제외하면 평양 소재 문화재들은 싹다 재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려]] 시대에는 [[개성시|개경]]과 라이벌구도를 형성하고 있었고 특히 고려 전반의 지역사는 개경과 서경의 대립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 맞설만한 정치적 힘과 문화적 정통성을 가진 도시는 평양 즉 서경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개경 귀족 입장에서도 서경(평양)이 아무리 뻗대도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라는 엄청난 정통성 때문에 쉽게 건들지 못했다. [[묘청의 난]]이 발생한 걸 보면 두 수도 사이에도 위상의 차이가 있던 정도다. 하지만 [[여몽전쟁]], [[홍건적]]의 침입을 직격으로 맞았고,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 [[청야 전술]]까지 동원되어 평양은 경제적 기반을 잃어버리고, 매국노들이 평양 일대를 원나라에 넘겨주는 큰 혼란도 겪으며 역사적 이름만 남은 채 정치적인 권력도 줄어들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여몽전쟁과 홍건적으로 쑥대밭이 된 고려 말의 사정으로 '2위 도시'라는 상징성 빼곤 한양과 경쟁 자체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조선은 삼조선과 고구려의 고도라는 이유로 평양의 역사적 가치를 중시했으나 정작 평양 출신들은 혈통적인 문벌을 중시하는 풍조로 조선조 내내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 이는 개경이 농사에 적합치 못해 평양에 비해 도시의 자립성이 낮았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경제수도와 행정수도를 분리했던 것에 비해, 한양은 자립성이 매우 높아 평양과 같은 경제수도가 필요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평안도 자체가 북방의 안정으로 경제력이 높아지고, 함경도 출신 이용익조차 고위 관료가 되며 이런 풍조가 사라진 구한말 이후부터는 오늘날로 따지면 서울-부산 사이의 관계와 비슷한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패강랭 같은 1938년의 소설에는 평양에서 특히 다른 고장보다 유명한 기생조차 서울말을 쓰려고 하고, 머릿수건을 매던 전통이 사라져서 서울에 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문화가 사라져감을 한탄하는 주장이 나온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22_0070_0030_0020|#]][[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2487|#]] 마천루가 서울보다 부산에 많듯[[https://www.hankyung.com/article/2023030233011|#]], 평양에도 기생 같은 것이 서울보다 앞선다는 말이 있었는데 식민 통치 속에 개성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다만 한국사에서 딱 한 번 평양이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 바로 [[남북국시대]]이며, [[신라]]에게도 [[발해]]에게도 수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사실상 양국의 완충지대에 위치해 있어 고구려 멸망 후 고려가 서경으로 삼기까지의 253년간(668~921) 폐허로 방치되었다. 수도인 기간은 길게 잡아도 약 500년으로 의외로 짧은 편이다. 고조선이나 고구려에서는 원래 다른 곳을 수도로 삼다가 왕조 후기에 평양으로 옮긴 것이었고 고려 서경은 위상은 높았다지만 결국 개경에 밀려 수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도였던 기간만 치면 서울이나 경주에는 확실히 밀리고 개성에 비해서도 확실한 우위라고 말하기 힘들다.[* 다만 신라와 백제 역시 삼국사기상의 건국 연대에 비해 실질적인 형성 연대가 늦기 때문에 천년고도라는 상징성과 달리(서울: 백제 500년+조선 500년, 경주: 신라 1000년) 실제적으로 수도 역할을 한 기간이 줄기는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래도 평양보다는 여전히 훨씬 길다.] 그러나 수도가 아니었을 때에도 [[한사군]]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곳이기도하고, 고구려 제 2도시(국내성 시기), [[고려]] 제 2수도, [[조선]] 제 2도시였기 때문에 꾸준함의 측면에서 인정받는다. 구한말까지는 서해안 쪽으로 뻗은 [[땅거스러미]]가 존재했기 때문에 과거에 [[진주시]]가 그랬던 것처럼 해안에 접한 도시였다. 그러다 1906년에 이 땅거스러미를 구성하던 반석면, 성태면, 적송면이 증산군[* 1914년 [[강서군]]에 편입되어 폐지됨.]으로 이관되면서, 서해에 접한 적송면을 잃고 내륙도시가 되었다. 분단 직전까지만 해도 현재의 남북한 영역에 있는 도시 중 '''가장 현재의 북한과 동떨어진 색채를 띠던 도시''' 중 하나였다. 특권계층이 자리잡은 현재의 북한의 평양과 달리 신분이 평범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던 곳이며, 조선 후기부터 상업으로 번성하던 곳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내가 남(南)으로 가게 된다면 북녘의 동포들은 '''[[김일성]]'''과 소련의 공산치하에서 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던 [[조만식]] 같은 우파가 가장 인기가 많던 곳이었고, 북한 당국이 가장 싫어하는 종교인 기독교의 교세도 가장 강했다. 그래서 북한이 펴낸 《조선향토대백과》에서 이러한 광복 전의 평양을 두고 '[[http://www.cybernk.net/board/BoardRead.aspx?mc=GU01&baseq=5&bseq=105&tema=5|비문화적이고 기형적인 상업소비도시]]'라고 깎아내릴 정도였다. 이런 세력이 꺾인 것은 정권 수립 직후에는 소련의 무력으로, 몇 년 뒤에는 김일성의 파격적인 특혜를 받는, 가려 뽑힌 숙청에 특화된 인물과 조직을 동원한 주민에 대한 삼엄한 감시와 지방 추방 등 각종 물리적 탄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원래 1948년 제정된 북한 헌법 103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府)는 [[서울특별시|서울시]]이다."라고 되어 있었는데,[[https://ko.wikisource.org/wiki/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_헌법_(제1호)|#]] 성립 초창기에는 한반도 정치체의 정통성이 서울에 있음을 은연중에 인정한 상태에서, [[적화통일]]을 전제했던 조항으로 보인다. 이 때까지는 평양은 일종의 [[임시수도]]와 같은 위상이었던 셈인데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은 서울에 엄청 집착했다. 그러다 남북분단 상황이 고착화되자 나중에 [[김일성]] 일인 독재 체제를 확립한 1972년 사회주의 헌법에서 이 부분은 삭제되고 대신 평양을 혁명의 수도로 규정하였다. 북한은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 기준으로 서울은 지방 대도시라는 것이다. 혁명의 수도라는 이름 하에 사실상 수도임을 인정한 다음부터 북한은 지금의 북한 지역에 중심지를 두었던 [[고조선]]이나 [[고구려]], [[고려]]와 그 뒤를 잇는 현재 북한정권의 역사성을 집중적으로 강조하며 [[단군릉]], [[동명왕릉]] 등을 크게 개건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한반도 정치체의 정통성이 남한과 서울이 아닌 평양에 있다는 선전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 [[대만]]도 2000년도 중반까지 헌법상 수도가 [[난징시]]였으나 [[타이베이시]]가 실질적인 수도이고, 민진당 정부에서 난징 = 명목상 수도라는 표현을 자제하게 되었다. 국민당 정부에서는 명목상 수도가 난징이라는 주장을 1년에 한 번씩 한다. 그나마 대만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지만, 북한은 6.25 남침 때 몇 달간 서울을 점령해 본 게 고작이다.] 다만 고대 국가는 고조선이라도 노예 소유 국가라는 등 모조리 깎아내리고 인민의 역사성을 강조할 때만 평양을 강조한다. 그래서 [[동학농민운동]] 같은 남부 중심의 민란도 교과서에서 잘 다루지만 왕은 시조 정도만 제대로 나온다. 보통 북한 교과서는 왕은 잘 안 나오고 장수, 예술가만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