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시 (문단 편집) === 풍수 === [[택리지]]에 의하면 100리 정도 되는 [[평야]]가 앞뒤로 펼쳐져 있어서 기상이 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평양의 [[풍수]]를 행주(行舟)형[* 도시 구조가 강에 둘러싸 지역이 마치 배와 같은 지형을 뜻한다. 남한에는 [[청주시]]가 행주형의 지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반대로 산에 의해 둘러싸인 지역을 장방형이라고 하는데, [[개성시|개성]]과 [[경주시|경주]]가 이러한 지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이라고 하는데, 평양 전체가 하나의 [[선박|배]]와 같기 때문에 [[우물]]을 만드는 것은 [[선박]]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고 여겨서 우물을 파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실제로 우물을 판 이후로 평양 시내에 많은 화재가 발생해서 우물을 다시 메웠다고 한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떠다 판 이야기는 평양의 풍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질학적으로 보면 평양은 두 개의 강을 끼고 있는 충적평야지대다. 따라서 지하수 수질도 별로 좋지 않을뿐만 아니라, 지하수를 지나치게 퍼내면 지반이 침하될 우려가 있다. 이런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닫고 과도하게 우물을 파지 말라는 구전이,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는 전승되지 않고 이 사실을 어기면 재앙이 찾아온다는 경고만 전해져서 전설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주형의 풍수를 보완하는 비보[* [[풍수]]의 모자라는 바를 채워주는 인공 지형물을 뜻한다.]로서 배를 묶는 닻과 같은 상징물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배는 재물을 뜻하고, 재물을 담고 있던 배가 떠나지 않으려면 닻으로 묶어둬야 된다나. 이러한 비보로서 연광정 밑에 닻이 묻혀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민간에까지 풍수지리설이 퍼져 있었던 남한과 달리 일본은 이런 것에 무관심했다고 한다.[* 이전 버전에는 한중일 3국중 남한만 유독 풍수가 발전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과 전혀 다른 서술이다. 풍수지리는 각국의 자연환경에 맞는 최적의 거주환경을 찾기 위해 발달되었다. 생존을 위해 겨울의 북서계절풍을 막아야 한다는 명제는 동일했지만, 주변의 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남한은 산같은 자연지형을 끼고 터를 잡는 음택풍수가 발달한 반면 중국과 일본은 흙이나 나무로 방풍벽을 조성하거나 바람이 오는 귀문방위를 피하는 양택풍수가 발달했다. 외국의 자연환경과 역사문화에 대한 무지로 해석함이 옳다. ] 그래서 일본인들은 이 닻을 건져 올렸는데, 하필 닻을 건져 올렸던 [[1923년]]에 평양 대홍수가 발생했다. 이에 기겁한 평양 주민들은 그 닻을 다시 찾아 다시 제자리에 묻어놨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