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성 (문단 편집) === [[고려시대]] === [include(틀:고려의 행정구역)] [include(틀: 고려의 궁궐)] >'''"평양고도(平壤古都)는 황폐하게 된지 오래지만 그 기지(基址)[* 성, 마을 등 옛 터를 이른다.]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풀과 가시가 무성하고 번인(蕃人)이 그 사이에 와 사냥하니 변읍(邊邑)을 해치고 있다."''' >---- >《[[고려사]]》 <태조 세가> 원년([[918년]]) 중 발췌. 당시 평양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초대 국왕 [[태조(고려)|태조 왕건]]은 평양을 매우 중시해 성을 쌓고 백성들을 이주해 도시를 채웠다.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고 선포하며, 고구려계 호족을 끌어모았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본인 또한 고구려계 패서 호족 출신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곧이어 평양은 서경(西京)으로 개칭되어 제2의 수도로 격상된다. 오죽하면 후대 임금들에게 남긴 10가지 중요한 훈수인 [[훈요 10조#s-2.5|<훈요 10조> 중 5조항]]에 서경을 중요시하라는 당부를 넣었을 정도였다. 서경은 제2수도 답게 매우 우대받았는데 서경에 세워진 [[장락궁]]은 평양성 안에 세워졌다고 추측된다. 평양성문의 이름이 장락궁문의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 이 장락궁(평양성?)은 [[황성]], [[나성]]으로 둘러싸여 개경의 본궐처럼 천자식 궁궐 제도를 이루었다. 자세한 건 [[장락궁]] 문서 참조. 제3대 [[정종(고려 3대)|정종]]은 [[왕식렴]]을 보내 아예 제1수도로 삼을려고 했지만 무산되었으며 이후 [[여요전쟁]]에서 주된 전장터가 되었고, 과거의 명성과 달리 수차례 함락되기도 했다. 제17대 [[인종(고려)|인종]]은 서경을 매우 중시해 서경 천도가 대세적 주장이 되지만 지나치게 권력이 쏠리는 걸 싫어한 인종은 서경 세력을 억제했다. 결국 1135년에 폭발한 [[묘청]]이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분사제도가 폐지되어 서경은 수도의 지위를 잃었다. 이후 몽골 침입 이후 동녕부에 속해 [[원나라]]의 영토가 되었지만 [[충렬왕]] 때 되돌려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