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성 (문단 편집) === 제24대 [[양원왕]] 이전 === [[고구려]]의 수도는 초기에 [[졸본성]]에서 [[국내성]][* 국내성은 평지성, 국내성과 연결된 [[환도성]]은 산성.]으로 옮긴 이후 계속 국내성이었지만, 국내성은 첩첩산중의 좁은 땅에 있었고[* 국내성이 있던 지안 땅은 [[신라]]의 수도가 있던 경주 분지의 반의 반도 안 되는 협소한 분지다.] 교통이 좋은 지리적 결절점이라고 보기도 어려워서, 영토가 넓어진 고구려에 적합한 수도는 아니었다. 결국 제19대 [[광개토대왕]]이 평양을 다지고[* 《삼국사기》에는 재위 2년째 되는 해에 평양에 사찰 9개를 지었다고 했으며, 재위 14년차때는 평양으로 대대적인 사민정책을 추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광개토대왕이 일군 9개의 사찰 중 하나인 영명사는 [[구제궁]]이라 불리며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 제20대 [[장수왕]]대에 [[국내성]]과 [[환도성]]에서 [[안학궁]]과 [[대성산성]]으로 천도했다. 보통 평양성이라고 하면 지금 이 문서의 장안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광개토대왕]] - [[장수왕]] 두 임금이 장안성에 천도했을거라 생각하지만 처음은 장안성 동쪽의 안학궁 - 대성산성으로 갔다. 장수왕은 해자와 궁성으로 둘러진 안학궁과 대성산에 성을 지어 수도 체제를 잡았다. 안학궁과 장안성은 둘 다 현재의 [[평양시]] 범위 안에 있으며, 거리도 그렇게 멀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장안성이 안학궁의 서쪽에 있다. 하지만 최근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서 장안성 이전의 평양성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학계의 고구려 도성 연구와 전망》, 박시현 저. ]. 특히 중국학계에서는 현 집안 국내성이 전기 평양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사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국내'와 '국내성'을 구별해야 하며[* 국내에선 노태돈에 의해 주장되기도 했다], 현 국내성과 전기 평양성의 이름이 혼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평양 역시 고구려의 도읍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서 해석해야[* 원래는 '수도(Capital City)'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던 '서울'이 현재의 [[서울특별시]]에 위치한 조선의 [[한성부]](한양)를 가리켜 부르는 고유명사로 굳어진 것처럼.] 전기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 역시 주장되었다. 비록 중국 학계의 한계상 [[장수왕]]이 현 지역으로 천도했다면 그 지역의 낙랑계 중국 한족들의 세력이 건재했기 때문에 무리가 있었을 것이었다 등의 억지스러운 주장을 깔고 가는 학자들도 있지만, 연구에 참여한 만주 지역 학자들의 주장에 중국 학계에서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과, 일제강점기 연구를 통한 지리적 고증을 반박하여 전기 평양의 위치를 현 평양 이외의 지역에서 찾고자 한 것은 국내 고구려 도성 연구에도 큰 의미를 준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서 《수경주》(515년), 《위서》(559년), 《수서》(656년), 《북사》(659년), 《통전》(801년), 《구당서》(945년), 《구오대사》(974년), 《신당서》(1060년) 등에 고구려가 586년 장안성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평양성은 예전 낙랑군 조선현이 있던 지금의 평양을 가리킨다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전기 평양성이 국내성(중국 지린성 지안시)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인다. 특히 《수경주》의 저자는 고구려 평양성을 감싸는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맞다고 결론내렸고, 직접 고구려 사신한테 지금의 고구려 국치(수도)가 있는 곳이 예전 낙랑군 조선현이 있는 곳이 맞느냐고 직접 물어보고 답변을 받아 적은 것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선 평양동황성이 국내성과 별개의 지역으로 나온다. 제11대 [[동천왕]] 시기의 평양동황성이 국내성 인근에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지금의 국내성과 같은 지역이라 생각하긴 어렵다. 환도성과 국내성이 조위의 장수 [[관구검]]에 의해 파괴된 이후 옮긴 곳이기 때문에 평양동황성은 당연히 환도성, 국내성과는 다른 곳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지금의 평양 이전의 이른바 '전기 평양'이 요동 어딘가에 있었을 가능성은 조선의 실학자들도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연암 박지원도 평양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평양 한곳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요동에도 '평양'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했으며, 그 전기 평양성의 위치는 [[봉황성]](鳳凰城)[*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요녕성 단동시 동북쪽의 봉황산성으로 비정된다. 고구려에서는 이 성을 오골성이라고도 불렀다.]이라고 지목했다.[* 다만, 박지원과 같은 실학자들이 활동하던 시기만해도 전근대라는 시대 특성상 현대적인 의미의 고고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상술한 《수경주》를 비롯한 중국 사서들의 언급의 경우, 동시대 고구려에 관한 기록들이므로 1000여년 후 사람인 박지원의 추론보다는 신뢰성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 열하일기 도강록의 내용도 박지원 개인의 견해인 것을 감안하자.] 열하일기 도강록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나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않았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 하겠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 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이름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 봉천부(奉天府)에 있다]의 동북 70리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3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라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肅愼)ㆍ예(穢)ㆍ맥(貊) 등 동이(東彝)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烏剌)ㆍ영고탑(寧古塔)ㆍ후춘(後春)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사군]](漢四郡)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해 놓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 물리는 것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나 낙랑(樂浪)은 있으나, 진번(眞蕃)과 임둔(臨芚)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B.C. 82)에 사군을 2부(府)로 합치고, 원봉(元鳳) 원년(B.C. 76)에 다시 2부를 2군(郡)으로 고쳤다. 현도 세 고을 중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고, 낙랑 스물다섯 고을 중에 조선현(朝鮮縣)이 있으며, 요동 열여덟 고을 중에 안시현(安市縣)이 있다. 다만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7천 리, 임둔은 장안에서 6천 1백 리에 있다. 이는 김윤(金崙)[* 조선 세조(世祖) 때의 학자]의 이른바, >“우리나라 지경 안에서 이 고을들은 찾을 수 없으니, 틀림없이 지금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진번ㆍ임둔은 한말(漢末)에 바로 부여(扶餘)ㆍ읍루(挹婁)ㆍ옥저(沃沮)에 들어간 것이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어떤 것은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어떤 것은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며, 어떤 것은 변하여 발해(渤海)가 되고, 어떤 것은 변하여 여진(女眞)으로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日本)의 성무 왕(聖武王)에게 보낸 글월 중에,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 풍속을 물려받았다.”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포괄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본디 우리 강토 안에 있었음은 더욱 명확하다. >그런데 한대(漢代)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서 이러쿵저러쿵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무릇 요동 이쪽의 강은 죄다 ‘패수’라 하였으므로, 그 이수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이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패수가 일정해져야만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져야만 고금의 사실이 부합될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성을 틀림없는 평양이라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만일 기씨(箕氏)ㆍ위씨(衛氏)ㆍ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 역시 하나의 평양이리라 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서》 배구전(裴矩傳)에,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더니, 한(漢)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으며, 또 광녕현(廣寧縣)에는 전에 기자묘(箕子墓)가 있어서 우관(冔冠 은(殷)의 갓 이름)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더니, 명(明)의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때 병화(兵火)에 불탔다 하며, 광녕현을 어떤 이들은 ‘평양’이라 부르며, 《금사(金史)》와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광녕ㆍ함평(咸平)은 모두 기자의 봉지(封地)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영평(永平)ㆍ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일 것이요, 《요사(遼史)》[* 원(元)의 토크토가 편찬했다.]에,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하나의 평양일 것이다. 나는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ㆍ광녕의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땅 2천 리를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아가니, 이는 마치 중국의 진(晉)ㆍ송(宋)이 남으로 옮겨감과 같았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패수도 역시 이와 같다. >고구려의 지경이 때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터인즉, ‘패수’란 이름도 따라 옮김이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州)ㆍ군(郡)의 이름이 서로 바뀜과 같다. 그런데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이는 대동강을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며, 평양과 함경(咸鏡)의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하며, 요양으로 평양을 삼는 이는 헌우낙수(蓒芋濼水)를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이는 자기네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함이다. >당(唐)의 의봉(儀鳳) 2년(677년)에 고구려의 항복한 임금 고장(高藏)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을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서 이를 통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고씨(高氏)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이 비록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를 갖지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주었은즉, 평양은 본시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씀으로 말미암아 패수와 함께 수시로 들쭉날쭉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에 있었다 하나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의 평양을 말함이다. >그 뒤 승국(勝國)[* 고려를 가리킨다.] 때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발해의 일경(一境)이 모두 거란(契丹)에 들어갔으나, 겨우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의 경계를 삼가 지키면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보지 않으니,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겠는가. 고려는 비록 안으로 삼국(三國)을 합병하였으나, 그의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ㆍ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패수요 이것은 평양이오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