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성 (문단 편집) === 외성 === 가장 바깥에 있는 성이다. 평양성은 나성(외성)→ 황성(내성) → 궁성(궁궐) 순인 중국 왕조식 도성제를 따른 성이 아니다. 그렇지만 까다로운 당시 기준이 없는 현대엔 내부 성벽을 뺸 평양성의 외성에 전체 바깥 성벽 길이를 합친 외성을 대충 [[나성]]으로 본다. 외성엔 총 4개의 문이 있었다. * 다경문: 고려 [[장락궁]]에 같은 이름의 누각이 있었다. 외성의 서문. * 선요문: [[고려]] 장락궁에 같은 문이 있었다. 외성의 북문. * 거피문: 외성의 남문. * 고리문: 외성의 동문. 고리문과 중성의 육로문 사이에 대동교가 있었다. 다리의 이름은 대동강에서 따왔다. 외성에는 일반인, 즉 평민들이 살았다. 허나 도성 안에 살 정도의 여유를 가진 나름 고위층들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서울에 자기 집 있는 사람들은 그 땅값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뿐이었다. 《[[삼국사기]]》 기록엔 [[고구려-당 전쟁]] 때 [[보장왕]]이 [[태대막리지]] [[연남산]]을 내보내 항복을 요청할 때 '''92명의 수령''''을 같이 내보냈다고 한다. 이들은 귀족인지 알 수 없으나 만일 귀족이 아니라면 외성에 살았을 것이다. 크기는 일반인 거주구역인 외성이 압도적으로 넓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고, 귀족 거주구역인 중성보다 좀 넓은 수준이었다. 외성 안엔 천연 해자인 대동강을 충분히 활용한 작은 운하가 외성 시가지를 관통했다. 이 운하를 다루기 위해 수구문들도 있었다고 한다. 외성을 쌓을 때 구간을 나누어 담당자를 정했는데 이를 비석에 기록했다. 발견된 비석엔 [[566년]]에 11리 구간을 소형(小兄)[* 고구려의 관등.] 상부(相夫)[* 고구려의 관직으로 추정이 된다.] 약모리(若牟利)가 담당했다고 한다. [[569년]]엔 12리 구간을 물성(物省)[* 역시 고구려의 관직이거나 정부 부서로 보인다.]의 소형(小兄)이 맡았다고 한다. 이 비석들의 발견으로 이 평양성이 바로 제24대 [[양원왕]]이 쌓은 장안성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삼국사기》 기록엔 양원왕이 552년부터 장안성을 쌓기 시작해 30년 뒤인 제25대 [[평원왕]]이 천도하기 때문.[* 고려 개경 나성이 완성되는데 21년이 걸린걸 보면 얼추 기간이 맞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