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부 (문단 편집) == 개요 == >'''西京 爲國根柢, 控制西北 人士樂業 有箕子之遺風焉''' >'''서경은 나라의 근거가 되고 서북을 제압하며, 백성과 선비가 업을 즐기니 기자의 유풍이 있다.''' >---- >[[이색(고려)|이색]], 「서경풍월루기(西京風月樓記)」中 [[조선시대]] [[평안도]]의 중심도시이자 조선에서 수도 [[한성부]] 다음으로 컸던 [[제2의 도시]]. 평안도 뿐만 아니라 조선 8도를 통틀어서 평양부보다 확실히 우위였던 지역은 수도인 [[한성부]]가 유일할 정도로 그 지위와 위상이 높았고, 특히 [[고조선]]과 [[고구려]]의 고도로서 그 역사성이 높이 평가되었다. 그리고 한반도 북부지역 최대의 대도시로써, [[의주부]]와 [[안주목]]과 더불어 손에 꼽히는 서북지역 고을의 지위를 무려 1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유지하였던 덕분에 여러가지 문화와 전통이 어울러지고 만들어지는 예향의 고장이었다. 또한 조선 건국 이후 멸망할때까지 총 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평안감영이 이곳에 위치하였으며, 조선 조정의 직접적인 관리가 아닌 평안감사([[관찰사]])가 평양부를 포함한 평안도 전역을 자치적으로 통치를 할 수 있었던 권력의 고을이다.[* 여기에서 나온 속담이 그 유명한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다만 인구 규모와 영향력과는 별개로 고려 말기의 [[원나라]]의 침공과 [[홍건적]]의 준동 같은 혼란 탓에 조선시대까지 내려온 명문가가 거의 없어 평양 사람들은 중앙 정계에서는 입지가 거의 없었고, 그 대신 북방의 정세가 차츰 안정되자 조선 후기부터 중국과의 인접성 및 상공업의 발달로 큰 부를 축적하였다. 이곳의 상인은 유상으로 불리며 [[의주부]], [[개성부]], [[한성부]], [[동래부]]의 상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